성령론 2부 요약(5-8장, 저자: 아처 토레이)
5. 성령 세례의 의의(意義)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니”,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시니”, “성령의 선물”,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등의 말씀들은 모두가 같은 체험에서 나온 말들이고, 현재에도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하고 계시다.
그리고 성서 저자(著者)들이 가졌던 경험을 내 자신은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이 경험을 얻으려고 힘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므로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었고, 변화된 그리스도인, 교역자(敎役者)가 된 것이다.
1)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①성령 세례는 사람이 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는 한 가지 역력(歷歷)한 경험이다.
성령의 세례는 자기가 그 세례를 받은 여부(與否)를 알 수 있는 확실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언제까지 기다리며 또 전도사업을 시작할 날이 언제임을 사도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행 1:4-5) 바울은 에베소 성(城)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 주심을 듣지도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중에는 한 인격적인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은 성령이 계심을 알았고, 성령 세례에 대한 분명한 약속도 알았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분명히 성령 세례를 받도록 하기에 힘썼다. 근래에 와서는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도 많이 하는데 모두가 막연하고 불확실하다. 성령과 세례는 이미 받았으면서도 성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성령과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②성령 세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서 하여 주시는 역사이다.
거듭난다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거듭난 사람들이었다.(행 1:5) 주님께서 그들을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단언(斷言)하셨기 때문이다.(요 15:3) 우리는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말씀에 대한 답변을 벧전 1:23에서 볼 수 있다. 이 성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이미 거듭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성령 세례는 받지 못한 것이었다.
빌립의 복음 전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무리 중에는 거듭난 사람이 적어도 얼마는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한 대목을 보아서, 이 거듭난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그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행 8:12-16)
사람이 거듭나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만으로는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그는 아직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완전히 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성서에 말씀한 대로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세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듭날 그 당시에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고넬료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교회가 흠이 없는 정상적인 교회라면 그 신자들이 거듭나면서 곧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렇게 정상적이지 못하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던 사마리아 신자들의 입장과,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기 전 제자들의 입장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세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생득권(生得權)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많은 신자들이 이 생득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실제로 체험하는 소유물로 삼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잠재적으로는 성령 세례를 받고 있으나 경험적으로는 그러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거듭날 수는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는 수도 있다. 성령 세례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분명히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교회에도 거듭나서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성령의 세례는 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세례는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뿐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할 준비를 하게하고 그 일에 적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를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 세례의 주요한 목적은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 마음속에 새롭고도 놀라운 기쁨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령부흥회, 사경회, 강습회 등에서 놀라운 경험과 큰 기쁨을 얻었으며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주의하여 보면 전이나 별로 다름없이 목사나 교회에 별로 협력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전보다 더 무용(無用)하게 되며 말썽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영혼을 사랑하는 생각과 구원하는 일에 더 힘쓰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성령 세례는 받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확언하건대 성령 세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자격이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이 자격을 얻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다.
2) 성령 세례의 결과
성령세례의 결과는 곧 권능(權能)이다.(행 1:8) 그것은 하나님에게 부르심 받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에 합당하며 성령 세례를 받기만 한다면 그의 생활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권능이 누구에게나 다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전 12:4-13) 여기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사용된 “여러 가지”와 “어떤 이에게”는 성령 세례는 하나이지만 결과는 여러 모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은사는 각기 그 부르심을 받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사상과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는 사상은 전혀 비성서적이요 반성서적이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웨슬레, 찰스 피니, 디엘 무디 등과 같이 전도자의 은사를 받는 것이라는 사상도 비(非)성서적이다. 특히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전도자의 권능을 가지게 된다는 그릇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죄악으로 이끌어가기 쉽다.
①실망이다. - 이는 절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는 수도 있다. 어떤 스코틀란드의 고임금(高賃金) 조선(造船)기술자가 성령의 세례에 대한 설교를 듣고 권능 있는 전도자가 되기를 구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세례를 받고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미네소타주로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그를 전도자로 부르시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전도의 길을 열지 못하고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렀다.
어느 주일 아침 그는 미네아폴리스 교회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사역할 일의 선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위스콘신주의 미개척지에서 주일학교 선교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열어 주신 사업을 하기 위하여 나아갔을 때에 그가 원하던 바로 그 은사를 받게 되었다.
②외람(猥濫)된 생각이다. - 이는 전도자가 되려면 성령 세례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도자로서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전도자로서 사역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할 수 있을만한 성서 지식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전도자로서의 권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③무관심한 태도이다. - 이는 셋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성령 세례는 목사나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이니 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겠지만, 나는 집에서 자녀나 키우는 것이 할 일이니 성령 세례가 필요 없다는 등의 생각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나 성서는 신자로서 전도사업 하는 데만 적합한 것이 아니다. “자녀들을 주 안에서 양육하고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하여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우리가 받을 특별한 은사나 나타내주심을 결정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즉 우리가 받기 원하는 은사와 사역을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그 선택된 은사와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택하신 은사대로 우리를 합당하게 만드시도록 간구하며, 성령께서 택하신 그 일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만드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가장 통탄할 일은 자녀들이 부모의 뒤를 따라서 자라나지 못하고 전혀 불신앙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 된 자로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자녀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권능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권능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 세례를 확실히 받는 일이다.
6. 성령 세례의 필요성
1)어떤 사람에게 성령 세례가 필요한가 - 눅 24:45-49
주님께서는 사역을 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기 전에는 그 일을 착수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준비는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며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인데, 이는 곧 성령 세례를 가리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에 있었던 가장 훌륭한 신학교에서 3년 이상을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본 것,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전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이 마련되기까지는 한 걸음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절대적인 한 가지는 바로 성령 세례를 받는 그 일이다. 여기에 “유(留)하다”라는 말은 직역(直譯)하면 “앉는다”는 뜻이다. 즉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앉아 있으라”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중대한 말씀인가.
성령 세례를 받아 이를 체험하지도 않고 복음전도사업을 착수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오늘날 교회는 일정기간의 연수 후에 그에게 안수하고 성직자로 일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준비되었는가? 우리에게는 목사후보생들을 성직자로 임명하기 전에 “그대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웠음을 확신 하는가” 즉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확신 하는가”를 물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이를 확신하지 못하다면 “그대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앉아 있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주님께서도 분명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공적(公的) 사업을 시작함을 용납하지 않으셨다.(행 10:38, 눅 3:21-22, 4:1) 이러할진대 우리가 능력을 입고 그것을 체험기도 전에 주님의 사역에 봉사함을 착수한다는 것이 될 말인가? 사도들에게 요구하셨던 바와 같이, 주님 자신이 취하셨던 태도와 같이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것을 체험하기까지는 주님을 위한 봉사를 감히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이 신설된 교회에 갈 때에 그들이 언제나 첫째로 살펴본 일은 신자들이 다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신자들이 확실히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음을 발견하였음에서이다.(행 8:12-17, 19:1-6) 그러므로 봉사를 하려면 중생케 하시는 권능과 심령 속에 내재하시는 존재자로서의 성령을 받을 뿐 아니라 능력을 입히움, 곧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비상한 사태를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충만함을 받았지만 또 다시 충만함을 받았다.(행 2:4, 4:8) 원어로서 “충만하다”의 시상(時狀)을 보면 바로 현재에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무리 분명하고 놀라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범하기 쉬운 과오는 과거에 받은 성령 세례의 능력만 가지고 그대로 사역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그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무디 전도자는 늘 말하기를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과연 사역에서 새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시시(時時)로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기름부음 받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눅 11-13장)
그런데 성령을 새로 충만하게 하는 것과 성령 세례를 새롭게 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세례라는 말에는 처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서에는 성령을 새로 충만하게 받는 것을 세례라는 말로 표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언제나 개인이 처음 맛보는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령 세례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용어의 정확한 뜻에 구속(拘束)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용어의 뜻을 다시 달리 해석하더라도 사역의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새로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2)누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행 2:39)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여기서 약속이라는 말은 구원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그들의 자녀를 구원할 것을 언약하신 특권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성령의 선물(성령 세례)을 주실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 해석일까? 이에 대해서 성서해석자들은 두 가지의 일반적인 해석법을 사용한다.
①사용된 용어에 의한 방법
성서에 쓰인 단어의 정확한 뜻은 어원학적(語源學的)으로 결정되는 일은 별로 없고 대개는 그 용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행 2:39에 쓰인 약속이라는 말은 행 1:4-5에 의해 성령이 세례를 주실 것을 말한다. 2:33에서도 이는 “약속하신 성령”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2:39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의 세례를 나타내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②문맥에 의한 방법
여러 가지 해석의 방법이 나올 경우, 그 구절의 전후에 나오는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해석함을 말한다. 성서 말씀은 한 구절도 따로 된 말씀은 없고 다 서로 연결되어 꼭 놓여져야 할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38절에서 베드로는 전에 자기가 말한 약속이 무엇임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이 약속은 틀림없이 성령의 선물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용법으로나 문맥상으로나 39절의 약속이라는 말은 성령 세례를 가리킴이 의심할 여지도 없다. 또한 여기서 “너희”, “너희 자녀”라는 말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아주 상관도 없다. 그런데 그 다음에 “모든 먼 데 사람”,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의 표현을 통해서 성령의 세례는 온 교회사를 통해서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베푸시는 것임이 분명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유업(遺業)이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그의 유업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다.
우리가 이 교리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게만 되면 의심 없이 받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가장 중대한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고 따라서 마땅히 주님께로 인도할 영혼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직자 중에는 잘못된 것을 한 마디도 남에게 전하지 않거니와 구원의 진리도 또한 전혀 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흔히 본다. 오늘날은 이단설을 한 마디도 말하는 일이 없거니와 구원의 진리도 전혀 전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어찌 많은지 알 수 없다. 얼마 전에 일간신문에 저명하다는 세 목사의 설교 제목이 예고되었는데, “애란인의 지혜”, “축구시합”, “나의 장모”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역사할 수 있는 신성한 강단에 서서 그 목사들에 대하여 어찌 근심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걱정되는 것은 복음을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하고 있는 교역자들이다.(고전 2:4) 가장 건전하고 가장 훌륭하게 정통 설교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 청중으로 하여금 지옥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권능 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되풀이 하여 성령의 영광스러운 권능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7.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
1)구원을 받아야 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우리가 성령 세례를 은사로 받기 원한다면 일곱 가지의 마땅히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이 일곱 가지 단계는 누구나 다 밟을 수 있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이며, 또 이 일곱 가지만 행한다면 누구든지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의 단계는 행 2:38에서 다 찾아낼 수 있다.
1단계 - “회개하여”
회개란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변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변화 및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이다. 이 구절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던 마음의 태도로부터 예수를 구주와 주로 모셔 들이는 마음으로 변화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구주(救主)로 모셔 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출석, 성경통독, 세례, 성찬, 십일조, 구제, 종교생활의 노력 등이 근거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직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롬 3:20)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다든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바에 근거를 두고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지신 그 공로에 전혀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고 성령 세례를 받을 첫 단계를 밟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는 첫 단계는 갈보리 산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업과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하셨음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예수를 모셔 들이는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서에 여러 번 반복하여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곧 의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소유물인 성령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에 인(印)을 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거짓교사들의 교훈을 들은 갈라디아 신자들은 모두 의혹에 빠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매우 분개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로 갔던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 그것은 이 거짓 교사들이 잠시 동안은 갈라디아 신자들을 혼란시켰지만 결국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장 위대한 교리를 밝혀준(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서보다 더 훌륭함) 동기(動機)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제일 먼저 아브라함 자신도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갈라디아 신자들의 주의(主意)를 환기시켰다.(갈 3:6, 롬 4:11) 둘째로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경험을 들어서 호소한다.(갈 3:2) 그들은 물론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노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2단계 -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
성령 세례를 받는 둘째 단계는 모든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영과 거룩하지 못한 죄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떠한 죄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만일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데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까닭은 필연코 죄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은 죄란 없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 대한 죄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일에 대한 죄라 할지라도 모두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므로 어찌 크고 작은 것이 있으랴. 죄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싫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모든 죄는 다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한 여자가 성령 세례를 구하며 늦도록 기도만 하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녀의 정신이상을 염려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도무지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기도 중에 그녀의 마음에는 머리에 꽂혀 있는 조그마한 장식핀이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핀을 빼서 내던지며 “에이 저리 가거라”하였다. 그러자 그녀에게 곧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다. 그녀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도록 했던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 곧 죄였던 것이다. 이처럼 성령 세례를 위해 먼저 해야 될 일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고 할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3단계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우리가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였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간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 세례는 은밀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자기의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인 것을 간증하는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2. 죄를 고백해야 한다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지정(指定)하신 방법은 세례이며,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은 물로 세례를 받은 때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공적(公的) 고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印度)에 있을 때에 처음으로 세례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곳에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세례를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손해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캘커타의 한 대학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곧 말 한마디 없이 아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정하신 방법대로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비록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다시 자기가 죄를 버리고 예수를 구주로 모셔 들인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4단계 - 순종이다(행 5:32)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명(命)하시는 한 가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의 중심은 의지에 있다. 순종의 본뜻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조건으로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성령 세례를 받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가정이나 친구나 모든 즐거움을 다 희생하고 멀리 외국 선교사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의 뜻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 세례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지를 완전히 바치지 않는다면, 비록 세상의 끝 날을 알리는 우레 소리가 날 때까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 하더라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께 자기들의 의지를 온전히 맡기면, 어려운 일 또는 전혀 당치않은 일까지도 요구하실까봐 두려워한다. 여자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자기들의 남편을 데려가시거나 다른 어떠한 무서운 일을 행하실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남자들은 또 남자에게 대한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키실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전히 그에게 순종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그 하나님은 분명히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버지로서 내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종이에 적어서 일과표로 만들어 그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을 광명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은혜와 권능을 모두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 중에는 우리 자신들이 하기 원하지 않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가장 행복스런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당신의 소유물이로소이다. 당신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저를 사셨으매 저는 온전히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보내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여 주시며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저를 써주소서”라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에도 전에 성령 세례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 세례를 받게 하신다. 그리고 전에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성령으로 새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우리가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면, 약속대로 충만하게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하나님과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거나 새로 충만함을 받기 바란다.
8. 성령 세례를 당장에 받는 방법
1) 다섯 째 단계 - 요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말씀을 주 예수께서 하실 때는 사 44:3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여기서 “갈한 자에게”라는 말씀이 곧 목말라하는 다섯 째 단계이다. 사람이 참으로 목이 갈할 때는 마치 몸에 있는 모든 숨구멍이 오직 물, 물, 물 하며 부르짖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영적으로 목마를 때에는 그는 오직 성령, 성령, 성령, 오 하나님이시여 성령을 주소서 하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한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아도 그대로 살아 갈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받으려고 갈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보람 있는 봉사를 하려면 성령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어떠한 희생을 해서라도 이것을 얻어야 되겠다고 갈망하는 지경에 이를 때에, 이 성령 세례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편하고 안락한 곳을 떠나 희생적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곳으로 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희생을 당하더라도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가? 만일 이러한 각오가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아무리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보람도 없이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수하게 성령 세례를 갈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 8:20-22에서 마술가인 시몬은 자진해서 많은 돈을 바쳤지만, 그것은 불순한 욕망이었으므로 그는 축복 대신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요히 하나님과 대면하여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기 위한 순결한 욕망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한 보다 더 큰 쾌락이나 권능을 얻기 위한 이기적이며 거룩하지 못한 욕망인지 알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이다.
2)여섯 째 단계 - 천부께 간구함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여섯 째 단계는 천부께 구하는 것이다. 분명한 성령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분명히 구하는 것이다. 이 분명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분명히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은 사도 시대의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교회에 언제나 임재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미 받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은사는 오순절에 온 교회에 주셨다. 그러나 전체적인 교회에 주셨으므로 교회의 각 개인은 각기 자신을 위하여 이 은사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자기 것이 되도록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은 “기도”라고 하였다.
그러면 신자마다 이미 성령을 모시고 있는데(롬 8:9) 무엇 때문에 또 성령을 위해 기도하는가? 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임재하시되 그 임재하심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마음의 한 구석에 숨어서 임재하시는 것과(모든 신자의 마음에 거하시듯)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충만을 받음) 우리의 심령을 온전히 성령이 점령하시고 계시는 것과는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의 온 심령을 점령하심이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 4:31, 8:15-16 등의 기사는 분명 오순절 이후의 일이다. 성서를 바로 상고하게 되면 오순절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신자들이 기도함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거나 또는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한 말씀으로 또한 실증(實證)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성서 말씀을 우리의 경험의 수준으로 낮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의 수준을 성서의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내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분명하고 확실한 경험이다. 성령 세례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로 충만케 하여 주신다는 것을, 마치 물을 마시면 해갈이 되고 음식을 먹으면 배부르게 된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내가 홀로 기도할 때 또는 다른 신자들과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마치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같이 또는 온 몸에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끼는 것같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위에 내리심을 받은 일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한 가지 예로, 무디 전도자의 시카고 집회 중에 어느 목사의 제의(提議)로 시카고의 목사들의 철야 기도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의 집회에는 마귀가 역사하여 그 집회를 망치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방해 때문에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별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특별한 은사를 받기 전에는 헤어지지 않기도 결심하였다. 한 밤중 쯤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셨다. 우리들은 참으로 갈급한 심정으로 합심하여 새벽 두 시까지 기도하였다.
우리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데 홀연히 성령이 강림하셨다. 우리는 모두 말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도한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들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충만함으로써 흐느껴 우는 소리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나는 만일 위를 우러러 본다면 그곳에 성령이 임재하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그때에 당한 일이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각기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그날 이른 아침에 각기 다른 곳으로 헤어져 갔다.
내가 1902년부터 여러 해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중에도 그날 새벽에 특별한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각처로 나가서 주의 사업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 일은 그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능을 받아 가지고 세상 땅 끝까지 나가서 전도함으로써 주님의 사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는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새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3)일곱 째 단계 - 믿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우리가 구하는 성령 세례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도저히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써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열렬히 구하면서도 그 간구함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으니 곧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의 믿음을 가르쳐 주셨다. 즉 손을 내밀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바로 그것을 잡을 수 있게 말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여러 가지 성서를 상고(詳考)하며 연구하였지만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요한 1서를 연구하다가 이 말씀의 뜻을 요한 1서 5장 14절과 15절에서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 할 때에,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확실히 성서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께서 정녕코 들어주실 줄 믿고 또한 알 수 있다. 곧 우리가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감각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처럼 분명히 성서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을 성령 세례에 관한 문제에 관련시킬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한 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은 행 2:39과 눅 11“13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일 5:14-15의 말씀대로 우리는 간구한 바를 얻은 줄로 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 우리가 받은 성령 세례는 우리의 생생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4) 세 가지 문제
①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착수하기 전에 성령 세례를 받은 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신 분명한 말씀에 의하여 아는 것이요, 둘째는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아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거나 못하거나 틀림없이 영감(靈感)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인하여 성령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②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 열흘을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제자들이 왜 열흘을 기다려야 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행 2:1-2은 오순절이 이르기까지는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이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교회를 설립하시기 위하여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오순절 이후이다. 무슨 기다림이 필요하겠는가?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기다림은 필요 없었다. 즉석에서 그들은 믿었으며(행 10:43) 그 자리에 성령께서 그들의 머리 위에 내리셨다. 사울에게도 기다림은 없었다.(행 9:17) 그런데 에베소의 신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이미 임하신 것을 모른 것뿐이었다. 바울이 그것을 알려주고 그래서 그들은 모임이 끝나기 전에 즉석에서 모두 성령 세례를 받았다. 성령 세례를 혹 기다려야 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 까닭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③성령의 은사에는 표시(標示)가 있는가? 아무런 표시도 없다면 성령 세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물론 표시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로 표시의 특성이다. 나는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을 하고서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잘한 것이다. 사도들이 그 사실을 성서에 기록했다면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경험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표시가 성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곧 주님의 사업을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이 생기는 것이다.
오순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방언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자랑삼아서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방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믿게 되었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표시는 억제할 수 없는 권능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근본적 표시가 될 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업을 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표시가 나타나는 시기(時期)이다.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순서대로 말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성서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셋째는 경험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 순서를 말씀, 경험, 믿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참 신앙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믿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때에 별 기쁨도 없었다. 그러나 아기가 출생하였을 때에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믿었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이삭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이유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어떠한 감각이나 경험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된 후에도 확실히 성령 세례를 받기까지는 몇 해 동안 설교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나의 서재에서 성령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며칠동안 계속 기도하였다. 그러자 마귀가 나에게 주일은 닥쳐오는데 네가 그때까지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시험하였다. 나는 “설교할 수 없으니 목사 일을 그만 두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절대로 설교단에 서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일이 닥쳐오기 전에 나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어떠한 특별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하였으나 그러한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일찍이 가져보지 못했던 가장 고요한 시간을 가졌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그처럼 고요히 앉을 수 있게 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까닭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제는 가서 설교를 하라” 내가 만일 그때에 성서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요한일서 5장 14절과 15절 말씀으로 나에게 일러 주셨으련만, 나의 무식함을 긍휼히 여기셔서 나의 영혼에 직접 말씀하여 주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였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하나의 새로운 목사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음을 체험한 지 얼마 후에 하루는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바로 그 방 의자에서 갑자기 마루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의 입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치 무슨 능력에 의하여 입이 놀려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히 믿음으로써 성령을 모셔 들였을 때에 이미 성령 세례는 받았던 것이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1894년 7월 8일, 메사츄세츠주 노드필드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설교하는 시간에 무디 전도자와 함께 산에서 성령 세례를 구하는 모임을 전했다. 그리고 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각자 자기 있는 곳에서 성령의 은사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했다. 그날 오후 세시에 우리 일동은 456명은 무디 전도자 모친의 집 앞에 모였었다.
산 중턱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무디 전도자는 각자가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75명가량의 사람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말하였는데, 그들은 대체로 말하기를 자기들은 세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줄로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간증이 끝나고 무디 전도자는 “우리에게라고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시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하고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청했다.
산중턱으로 올라갈 때는 구름이 산 위에 덮이었는데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구름이 흩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구름이 노드필드 상공에 열흘 동안 덮여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성령이 구름을 뚫고 우리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이여!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건물 위에도 여러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구름이 덮여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자리에 왜 성령의 비가 쏟아져 내리지 않겠는가?
- 이 상 -
讀書後記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성령에 관한 이론들은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모두 긍정적 방향으로 수용해 주고, 그것을 성령의 체험으로 인정해 주려는 무리한 시도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교계(敎界)의 노력은 부족하기만 하다.
성령론 또한 조직신학의 핵심이 되지 못하고 부록정도로만 취급당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다양한 체험들을 일일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하기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행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령론 자체도 다양성을 수용해 주는 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종교적 체험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단(敎團)으로 형성될 정도가 되었다. 신비로운 체험이 없는 자는 신비로운 체험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한수 아래인 것처럼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또 목회 지망자들도 가장 손쉽게 목회에 성공하는 한 방편으로 자유로운 종교체험을 요긴(要緊)하게 생각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체험을 습득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자문(諮問)을 구하며 모방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목회의 성공을 위한 이러한 사태(事態)는, 성경보다 교회를 우위(優位)에 두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이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단체임을 쉽게 잊고서, 교회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있다. 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성령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선언을, 일반 교인들의 종교적 체험을 정당화 해 달라는 요구에 밀려서, 양보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토레이 목사의 성령론은 종교적 체험을 성경의 선언에 거울처럼 비추어 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의 정욕을 죽일 때에 한해서 성령의 열매는 맺히도록 되어 있다.(갈5:16-18)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십자가의 운명을 답습(踏襲)하도록 하신다. 바른 고난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한 상태이다.(벧전 2:21, 4:14) 이에 대해서 토레이는 말한다. “우리가 심령 속에 이 성령의 샘을 가졌다면 도저히 세속적인 유쾌한 일에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의 수정 같은 맑은 샘이 있다면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흙탕물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쾌락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이다”(P 103)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 경험은 온 천지를 향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당했던 사건을 오고 오는 역사 속에 재현시켜 모든 인간 역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자신과 똑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땅 끝까지 흩어 놓기 위한 종말적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령의 강림과 체험을 현세기복주의(現世祈福主義)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공지상주의(成功至上主義)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령을 교회성장이라는 세속적 욕심을 이루어 주는 무속종교의 신적(神的) 힘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이야말로 성령 훼방죄가 아닌가?
“우리를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세례의 주요한 목적이 아니다...(중략)...성령세례의 근본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P 121) 그렇다 폭발적인 성령강림과 그 체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 형상은 예수님의 고난도 함께 수용하는 운명 그 자체를 뜻한다.
종교적, 사업적 욕심을 정당화 해주는 오늘의 사이비(似而非) 성령 운동을 보면서, 우리는 메시야적인 고난의 심정으로 이것들을 탄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성령의 마음을 가진 성령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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