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Simpson의 성령론과 성결교회
1. 서론
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 성결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C&MA)의 창설자인 Albert Benjamin Simpson의 성령론을 연구하려는 것이다. 심프슨은 웨슬리안-성결 그룹에 속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성결교회는 그 창립 초기부터 심프슨의 사상과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카우만(Charles E. Cawman)이나 길보른(Ernest E. Kilbourne) 등이 비록 교단적, 교리적인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미국 부흥운동의 열기 속에서 심프슨과의 연관이 깊었으며, 성결교회의 대표적 정기간행물인 <活川>지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심프슨의 글이 번역되어 실렸다. 심프슨의 Four-Fold Gospel은1) 그의 또 다른 저작들과 함께 성결교회 내에서 애독되고 있다.
심프슨의 성령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해 필자는 우선 19세기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났던 성령운동의 여러 조류들 가운데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흐름을 살펴 보고,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심프슨의 성령론이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 볼 것이다. 이어서 심프슨의 성령론이 형성되고 발전된 모습을 살펴보며, 그의 성령론이 지닌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것이다.
심프슨의 성령론은 그동안 한국 성결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리고 ‘성결교회에 과연 성결이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고민하는 성결교회를 위해 심프슨의 성령론은 무언가 조력할 메시지가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얻고자 우선 한국 성결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그의 저술들의 내용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심프슨의 성령론에 대해 언급한 성결교회의 몇몇 신학자들의 글을 통해 비평을 하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심프슨의 성령론이 지닌 특징들을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성결교회의 ‘성결성 회복’을 위한 유익한 교훈이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2.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
미국에서는 남북전쟁(1861-65) 전, 특히 1840년경에 이르러서 완전주의(perfectionism)가 사회적, 지성적 그리고 종교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 되는 주제가 되어갔다.2) 그러자 미국 개혁파 전통에서 새로운 형태의 완전주의가 Charles G. Finney와 Asa Mahan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피니는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을 거친지 몇 년 후, 두 번째 축복을 체험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 동료들은 이른바 ‘오벌린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라고 불리는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3)
1857-58년의 부흥운동 기간에는 장로교 목회자인 William E. Boardman에 의해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The Higher Christian Life)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특히 Methodists 전통 이외의 사람들에게 성결의 은혜를 해석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4) 그는 개혁주의 전통의 긍정적인 측면,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거듭난 신자가 그리스도께 대해 온전한 헌신을 하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의식적인 증거’(a conscious witness of Christ's indwelling)를 얻게 된다. 그는 이 두 번째 회심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5)
이렇게 해서 시작된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the Higher Christian Life) 운동에는 보드맨 외에도 Robert Pearsall Smith와 Hannah Whitall Smith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비록 그들은 미국인이었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영국에 크게 미쳐서 마침내 Keswick 운동에도 큰 감화를 주었다. Keswick 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인 Evan Hopkins는 죄의 뿌리를 죄성이 아닌, 악에 대한 경향성으로 설명했다. 이같은 홉킨스의 견해를 Handley Moule이 다소 온건한 형태로 추종하였다. 이같은 초기 Keswick의 죄에 대한 이해가 후기에 와서는 세대주의적 영향으로 F. B. Meyer와 같은 이들을 통해 육체적 전적 부패성과 죄성의 억제설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졌다.6)
1865년에 전쟁이 끝나고 1870년대에 접어들자,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미국 개신교는 또한 영국 등지로부터 건너온 성서의 고등비평과 다윈주의에 노출되어 크게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특히 남북 전쟁 이후 임박한 종말론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대대적인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성령운동은 이같은 도전과 요청에 직면하여, 전쟁 전의 성령운동이 인간의 의무와 능력을 강조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비관적 견해와 함께 특별히 성령의 능력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지게 되었다. Handley C. G. Moule, F. B. Meyer 그리고 Andrew Murray와 같은 케직 운동의 지도자들은 1870년대 이후 영국인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Asa Mahan이 1870년에 발행한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Ghost)는 북미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는데, 이 책은 그가 전에 영향을 받은 오벌린 완전주의 등에 기초한 것이었다. 마한의 가르침 속에서 특징적인 것은 “사람이 구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다”7)는 견해였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봉사와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피니도 마한과 마찬가지로, 그의 후기 사역에 있어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8) 초기에 그는 오벌린 완전주의의 선구자로서 참 신자에게 나타나야만 할 변화된 윤리적 삶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런데 그의 후기 사역에서는 그 중심점이 우리의 자유의지와 믿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성결을 부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하고, 이 은혜는 신자가 자신의 의지를 성령의 인도와 지도와 영향과 통치하심에 온전히 헌신하게 될 때 주어진다고 했다. 피니의 성령론이 가장 완숙하게 나타난 것은 그의 마지막 저술인 「능력의 부여」(The Enduement of Power)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핵심은 신자는 성령세례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인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9)
187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대중복음전도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서 Dwight L. Moody를 들 수 있다. 부흥운동가로서, 비록 신학적인 깊이는 없으나, 그의 저술 속에는 거룩한 삶과 특히 봉사의 능력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난다.10) 웨슬리안-성결 그룹과는 달리, 무디는 성결이 순간적인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친 지속적인 신앙의 열매라고 보았다. 그래서 성령세례와 성결을 연관시키는 어떠한 종류의 이론도 그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11) 무디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Secret Power)에서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2)
무디에 의해서 강조되어지던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이는 Reuben Archer Torrey이다. 무디는 자기가 인도하던 부흥운동에 자주 토레이를 초청하여 그에게 성령세례에 대해서 가르치도록 하였다.13)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명확한 체험이라고 강조하면서, 신자들은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14) 그는 확언하기를, “성령세례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의 능력을 위한 목적을 가진다”15)고 했다. 그는 개혁파적 전통을 따라 죄성이 순간적으로 제거된다고 하는 관념은 거절했으나, 성령의 사역이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일을 돕는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열매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무디나 토레이와는 달리, Adoniram Judson Gordon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고, 또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유익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16) 기독교연합선교회(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의 창시자인 A. B. Simpson의 성령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이들은 Boardman과 Gordon 등의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 노선의 개혁파 성령운동 그룹이다.17) 그런가 하면 심프슨은 케직의 지도자들과도 믿음과 강단을 활발히 교류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서 무디와 심프슨이 함께 개최했던 대회에서 Meyer, Murray 같은 케직의 지도자들이 설교하곤 했던 것이다.18)
이처럼 심프슨의 성령론은 넓게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속해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보드맨이나 고든과 함께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말은 심프슨의 성령론 노선이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정화와 능력’ 중심이나 또는 무디나 토레이 등의 ‘사역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중점을 둔 성령세례론보다는 좀더 기독론에 근접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충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3. 심프슨의 성령론 형성과 발전
심프슨의 일가는 원래 스코트랜드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1843에 9남매 중의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부모의 신앙은 대단한 감화력을 심프슨에게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마음의 평강을 가지고 결코 격정을 내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의 정서와 시적인 감동으로 어린 심프슨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내 나이 6살이 채 넘지 않았을 때 나는 마치 예수께서 인격으로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것처럼 예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곤 했다.”19) 심프슨은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에 대한 훈련을 부모로부터 감화 받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 구파의 장로였고, 소요리문답(the Shorter Catechism)이나 예정 교리 그리고 청교도적 신앙 원리를 잘 준수하고 있던 경건생활에 철저했던 사람이었다. 심프슨은 어릴 때부터 청교도 신학자들의 글들, 그리고 소요리문답의 질문과 답변 등에 의해 신앙을 훈련 받았다. 후에 심프슨의 제 이차적 축복의 교리로서의 성령세례론을 지탱해 준 것도 역시 청교도의 충만한 확신 교리의 영향이었다.20)
14살 때 자기 형제가 권총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한 후, 심프슨은 장래에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이를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심한 질병으로 시달림을 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믿음이 없이 증거를 찾고 있었는데, 그 순간부터 나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성령께서 보혈에 대해 응답하시고 또 나에게 대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21)
Knox College에 입학한 후에도 그에게는 성령의 체험이 없었다. “나의 종교생활은 기쁨이나 주님과의 교제가 별로 없는 단순히 의무적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나의 영혼은 성결하지 못했고, 아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례의 비밀을 알지 못했었다.”22) 그는 1865년에 대학을 졸업하였고, 같은 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낙스교회에 부임하였다. 1870년 그가 교회를 옮겨 Louisville에서 목회할 때,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고자 Moody의 집회에 참석였고, 이어서 Boardman의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Whittle과 Bliss와 같은 부흥사들의 영향 하에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23) 휘틀과 브리스는 심프슨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사역에 영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심프슨으로 하여금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경험을 추구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심프슨의 성령론은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노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에 근거를 두었지만, Moody나 Torrey와는 달리,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에 의한 전인적 통치에 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노선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William E. Boardman, Adoniram Judson Gordon 등의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 지도자들, 그리고 F. B. Meyer, Andrew Murray와 같은 Keswick 운동의 지도자, 그리고 심프슨 등을 들 수 있다.24) 심프슨은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이루어주시는 성결은 성령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오시는 체험이며, 성결의 체험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능력과 승리가 주어진다고 하였다.25)
심프슨은 성결과 성령 체험의 거룩한 동력은 성령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주 예수와 우리의 연합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활동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 성령의 사역이다.”26) 심프슨도 역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물론 그가 이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단지 거듭난 신자 속에 성령께서 자동적으로 거하신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은 신자가 온전한 헌신을 통해 특별하게 영접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27) 심프슨은 성령세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통치’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분여된 세례란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과는 다른 그 무언가를 가지고 세례주신다고 하듯이 들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영 향이나 느낌이나 능력 같은 종류로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 그 자신이 바로 세례이다 (the Spirit Himself is the baptism).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푸시고, 그 세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 안에 또는 성령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번에 영원히 성령세례가 주어지고, 그때로부터 성령 그분께서는 우리의 내주하시는 생명(our indwelling life)이시다.28)
이처럼 심프슨의 성령론의 핵심은 명백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화된 신자 속의 그리스도의 온전한 내주에 대해서 가르쳤다. “성결은 인간의 자기 개발이나 완전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함이다.”29) 심프슨의 성결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성결은 죄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2) 성결은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것(dedication)을 의미한다. (3) 성결은 하나님의 모습과 일치하게 되는 것을 내포한다. (4) 성결은 또한 하나님의 모습에 일치한 동시에 그의 뜻에 일치함을 의미한다. (5) 성결은 하나님과 온 인류를 향한 사랑, 최고의 사랑을 의미한다.30)
심프슨은 누구든지 성결 체험을 하고 난 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까닭은 그가 주님을 계속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지속적인 성결을 보장해 준다고 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소개하였다; (1) 그가 우리 안에서 걸어가시도록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2)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자각 속에 불붙고 우리 마음에 도장 찍히듯이 남겨지기까지 그의 생애를 공부해야 한다. (3) 끊임없이 그의 모습을 우러러 보고, 그 모습을 우리 행동의 하나하나의 세밀한데까지 적용해야 한다. (4) 그대 자신에게서 실패에 직면해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5) 끝으로, 성령께 구하자.31)
이와 같은 성결에 대한 심프슨의 입장은 개혁파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 노선과 비슷하였다. 즉, 죄성의 정화 차원을 강조한다거나 성결이 신자의 영혼 속에 이루어진 어떤 구체적인 상태라고 보기보다는, 내주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복종의 삶을 통해 그분이 준비하신 성결의 은혜를 적용하는 것이 곧 성결이라고 본 점이다.32) 이처럼 그는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사역 사이의 관계성을 크게 강조를 하였다. 특히 성령의 능력을 통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indwelling Christ)에 대한 그의 강조가 돋보였다.33)
성령세례의 능력을 바탕으로 정력적으로 사역한 심프슨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큰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점차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1887년에 the Christian Alliance를 조직하였다. 이 연합회에 가입한 교회들은 초교파적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중복음(four-fold gospel)을 강조하는 공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1889년에는 심프슨이 캐나다에서 International Missionary Alliance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두 개의 독립된 단체가 1897년에 연합하여 마침내 C&MA를 구성하여 심프슨이 초대 회장을 담당하였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힘차게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큰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34)
4. 성결교회와 심프슨의 성령론의 연관성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첫 번째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있다. 오벌린 완전주의가 너무 인간적 차원에 맞춘 것에 불만한 Higher Life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령론이라든가, Keswick에서 시작된 성결운동이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 것 역시 그렇다. Gordon이나 심프슨의 강조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두 번째 핵심으로서, Mahan이나 Moody 그리고 Torrey에게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중생한 자가 위로부터 받는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 관념을 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핵심은 내한(來韓) 선교사들을 통하여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 성결교회의 창립은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활동과 끊을 수 없는 관련을 지니는데, 이 동양선교회를 창립한 카우만(Charles E. Cawman)과 길보른(Ernest E. Kilbourne) 등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 중에는 심프슨의 집회로부터 받은 감화가 크다. 심프슨은 개혁파 성령운동가나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을 구분하지 않고 폭넓은 교제와 사역의 공조를 이루곤 하였는데, 한국 성결교인들에게도 심프슨의 글은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박명수는 설명하기를, 대부분의 초기 한국 성결교인들은 개혁파의 ‘더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 노선의 심프슨이 분명히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지도자였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였다.35)
1928년부터 1932년까지 A. B. Simpson의 성령론이 <활천>에 연재된 것은 의미가 있다.36) 성령의 내주에 대한 심프슨의 글이 기록되기를, “그는 죄깊은 마암에 新生命이 드러온 거인대 이는 신생명이 녯것을 逐出하고 그곳을 점령한다. 이는 自我의 생명을 개선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순결하여져서 죄를 범할 수 없는 신생명 즉 하나님의 聖生命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일이다”37)라고 하였다. 또 이 새생명은 신자의 죄성과는 관계 없이 성숙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는 死中의 생명이 부패중의 순결이다. 이는 그 살아잇는 흙의 여하에도 관계치 안코 또 그 더러움에도 혼잡하지 않이 하는 것이다. 영혼 중에 잇는 성결의 생명도 맛티 이와 같다. 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새움과 같이 하나님의 뿌리로부터 나와서 우리의 죄깊은 성질과는 하등의 더부름이 없이 오직 이는 天의 뿌리로부터 나와서 그 자신의 순결과 풍부를 가지고 우리들 안에 생장하야 드디어 聖別된 天的 생애의 풍부한 열매를 맺기까지 성숙하는대 니른다. 이는 엇던 의미든지 자기 자신의 생명이 않이라 하나님 자신의 內住의 임재와 그 깨끗한 것임을 感한다.”38)
특히 성령의 임재를 늘 인식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심프슨의 글이 소개되었다; “성신을 힘입어 행함을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생명, 神과 魂과 身을 위하야 성신께 의뢰하는 습관의 계속이라고 말할 수 잇다.”39) “성신을 힘님어 행함은 우리 안에 聖臨在로 내주하시는 성신을 인식함이다. 우리들은 종종 성신의 성임재를 구한 뒤에라도 성신은 우리를 속이시는 이와 같이 취급하며 또 저가 멀니 게시는 이와 같이 멀니 저에게 향하야 부르짖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말고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성신을 인식하며 현재 나에게 내주하야 게시는 친구와 같이 저에게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그리하면 성신은 언제든지 항상 우리들의 인식에 응답하시와 저 녯적 하나님의 성임재와 같이 말삼하실 것이다.”40)
성결교회가 1961년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분열된 이후, 예성에서는 1973년 또 한 차례의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분열 후 혁신 측 예수교대한성결교회에서는 웨슬리안-성결 단체인 Inter-Denominational Holiness Convention와 제휴했으나, 후에는 개혁파 노선인 C&MA와의 제휴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심프슨의 글들은 예성에서 친숙히 다루어지게 되었고, 분열 16년이 지난 1988년에 예성은 다시 하나로 합동했으며, 하나된 예성은 C&MA를 공식적인 자매결연을 통해 새롭게 맞이하게 되었다.
5. 심프슨의 성령론에 대한 성결교회 신학자들의 비평
서울신학대학 교수였던 임종우41)는 1958년 3월호인 291호부터 1959년 3월호까지 12회에 걸쳐 ‘성결의 복음’을 연재하였다. 임종우는 성결을 성결의 시초인 신생(新生)과 완전한 성결로 나누었다.42) 그리고 그는 “성신세례의 역사가 이천년전에 일어나고 지금은 그러한 역사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자들도 많으니 말세의 징조이며 성경을 곡해하고 불신한데서 나오는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43)고 개탄하였다. 그는 심프슨의 성결론에 대해서 평하기를, 웨슬리안 성결관과 상이점과 상통하는 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았다.44) 이같은 그의 글은 아직 비판적 성결론이 무르익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학구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내용이었다고 본다.
성결대학교의 명예교수인 이성주는 특히 C&MA의 창시자인 심프슨의 노선은 웨슬리안 성결운동 노선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심프슨이 가르친 성화(sanctification)의 교리는 한국성결교회에서 주장하는 성결론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전제하고,45) 심프슨의 성결론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성결론이며 또한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 있는 성결론이 아니라고 보았다.46) 특히 심프슨의 성결론은 죄의 내주를 육신에 두지 않고 그 영혼 가운데 둠으로써, 육신의 죽음으로도 죄를 제거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47) 이같이 이성주가 심프슨의 성결론 비판의 강도를 높이게 된 것은, 1988년 이후 C&MA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의 결연이 공식화됨에 따라 전통 성결교회 교리에 혼선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처사였을 수도 있다.
성결대학교의 명예총장인 성기호는 심프슨의 성결론이 원죄제거설이나 원죄억압설의 어느 한 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성결이란 바로 ‘그리스도 자신’(Christ Himself)인데 신자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자아에 대한 지배와 능력을 강조하였다고 보았다. 즉, 성결의 단계에서 예수 충만을 통해 죄와 자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은 성결을 체험한 신자에게 원죄가 존재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케직 견해와 유사하지만, 원죄가 억눌려 있는 상태라고도 말하지 않음으로 심프슨의 견해는 ‘예수충만설’(the Theory of Fullness of Jesus)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평하였다.48)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심프슨의 성령론과 한국 성결교회와의 연관성은 매우 크다.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심프슨의 글들은 전형적인 웨슬리안 성결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한국인 독자들에게 읽혔다. 적어도 심프슨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신학적 비평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심프슨의 성결에 대한 설명이 개혁파 노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성결 체험 이후의 지속적 성숙의 차원을 해설하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순간적 성결과 죄성제거설에 대한 교리적 교훈이 지속되었으나, 성결 체험 이후의 영적 관리에 대해서는 자칫하면 도덕주의로 빠져들 위험성이 많았다. 이때 심프슨의 지속적인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한 메시지가 순간적 성결 체험 이후의 영적 관리에 대해 큰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49)
6. 결론
심프슨의 성령론은 초기 성결교회로부터 현재까지 저술이나 교류를 통해 성결교회와 상당한 관련을 갖고 있는데, 특히 심프슨의 C&MA는 현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는 더욱 밀접한 결연관계에 있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심프슨의 성령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에 속한 것이요,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조류에 속해 있다. 이처럼 심프슨의 성령론이 성결교회 성결론과는 뚜렷한 강조점의 차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성결교회에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심프슨의 성령론이 지닌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살필 수 있었다.
1) ‘죄성제거설’이 아닌 ‘예수충만설’의 성령론이다.
심프슨의 성령론은 웨슬리안 성결론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죄성제거설’(Eradication)과는 대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심프슨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 전통의 인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기 때문에, 죄성제거설이 아니라 ‘예수충만설’50)의 입장을 보인 것이다.
2) 성령론의 소극적인 면보다는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죄의 근절’이나 ‘죄의 억압’과 같은 죄성을 다루는 성령론의 ‘소극적 차원’보다는, 심프슨이 지닌 관심은 성령론의 ‘적극적 차원’을 더욱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심프슨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사역의 능력’(power for service) 모티브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러나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그는 ‘정화’나 ‘능력’보다는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통치’의 모티브에 접근해 있는 것이다.
3) 순간적 성결의 체험과 함께 지속적 성결의 교훈이 강조되었다.
심프슨은 그의 「사중의 복음」 제 5장에 ‘하나님과 동행’(The Walk with God)의 내용을 첨가하였다.51) 이는 하나님과 쉬지않고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실제적인 성결을 구현하게 되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고 본다. 지속적 성결의 길, 그것은 지속적인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와 충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4) 선교지향적인 역동성을 지닌 성령론이다.
심프슨의 성령론에는 선교지향적인 역동성이 강조되었다. 조귀삼은 심프슨의 성령론을 포함한 사중복음의 핵심이 기독론에 있다고 보면서, 선교의 주체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을 이룬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선교신학을 이루게 되었다고 보았다.52)
5) 기독론 중심의 모티브와 목표를 지닌다.
심프슨은 죄성억압설이나 죄성제거설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령론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날의 남녀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순간으로서의 성결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53) 그는 개혁파 성령운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의 관점을 중시하였다.54) 그러면 심프슨의 성령론이 성결교회의 성결론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인가? 우선 심프슨이 성결의 순간성 뿐 아니라 지속성 역시 제시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또 하나는 성화의 목표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의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면 성결교회 성결론에서 자칫 간과되기 쉬운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 현대의 성결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첫째, 한영태는 한국 성결교회의 성결론이 순간적인 성결 체험의 차원만이 아니라 성화의 점진적인 면에 대해서도 강조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55) 성결교회의 성결론은 그 경험의 순간성이 강조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그 경험 이후 지속적으로 범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지속적 승리의 길은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와 통치를 받는 삶에 있다(갈 5:16-26). 이 점에 있어서 심프슨의 성령론은 한국 성결교회가 전통적으로 순간적 성결만을 강조한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지속적 성결의 교훈을 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심프슨 성령론의 기본 골격이 개혁주의적인 것을 고려한다면, 성결교회는 차라리 웨슬리안 전통 속에서 지속적 성결의 교훈을 찾아 적용함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에는 순간성과 지속성에 대한 교훈이 병행되어 있기 때문이다.56)
둘째, 현대의 성결교회에는 이제 성령론의 적극적인 차원을 더 많이 강조해야 할 것이라는 인식이 일고 있다. 박명수는 성결교회의 성결론이 성결의 소극적인 차원인 ‘죄성의 제거’보다는 적극적인 차원인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한 강조를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57)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서의 성화의 이상을 강조하는 일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또 교회사적으로도 가장 영속적인 복음적 성령운동의 모티브이다.58) 현대의 웨슬리안 성결론의 중요한 경향성 중에는 명백하게 하나님 형상의 구현으로서의 ‘그리스도 닮기’(Christlikeness)를 목표하고 있다는 점도 역시 주목할 점이다.59) 성결교회 성결론의 근본적인 역동성이 ‘죄성제거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함께 그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대한 적극적인 성화의 메시지가 고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의 성령운동가들은 뜨거운 부흥운동의 일치와 교류의 열기 속에서, 비록 교리적, 교단적 노선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서로가 지닌 전통의 장점들에 참여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의 활동은 단지 자국 내의 부흥운동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세계선교를 향한 능력으로 확산되어, 부흥운동을 통해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해 마침내 한국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저마다 지닌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성령론 논쟁으로 인해 피곤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잎만 무성한 성령론 논쟁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 부흥과 성숙의 열매를 가져올 복음적 성령의 능력이다. 이러한 역사적 요청 속에서 성령 체험과 그 능력을 강조하는 성결교회는 복음적 순수성과 역사적 전통성을 지닌 ‘성결의 복음’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힘있게 전파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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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7일 토요일
R. A. 토레이 著「성령론」 5/8
성령론 2부 요약(5-8장, 저자: 아처 토레이)
5. 성령 세례의 의의(意義)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니”,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시니”, “성령의 선물”,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등의 말씀들은 모두가 같은 체험에서 나온 말들이고, 현재에도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하고 계시다.
그리고 성서 저자(著者)들이 가졌던 경험을 내 자신은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이 경험을 얻으려고 힘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므로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었고, 변화된 그리스도인, 교역자(敎役者)가 된 것이다.
1)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①성령 세례는 사람이 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는 한 가지 역력(歷歷)한 경험이다.
성령의 세례는 자기가 그 세례를 받은 여부(與否)를 알 수 있는 확실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언제까지 기다리며 또 전도사업을 시작할 날이 언제임을 사도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행 1:4-5) 바울은 에베소 성(城)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 주심을 듣지도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중에는 한 인격적인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은 성령이 계심을 알았고, 성령 세례에 대한 분명한 약속도 알았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분명히 성령 세례를 받도록 하기에 힘썼다. 근래에 와서는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도 많이 하는데 모두가 막연하고 불확실하다. 성령과 세례는 이미 받았으면서도 성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성령과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②성령 세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서 하여 주시는 역사이다.
거듭난다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거듭난 사람들이었다.(행 1:5) 주님께서 그들을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단언(斷言)하셨기 때문이다.(요 15:3) 우리는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말씀에 대한 답변을 벧전 1:23에서 볼 수 있다. 이 성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이미 거듭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성령 세례는 받지 못한 것이었다.
빌립의 복음 전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무리 중에는 거듭난 사람이 적어도 얼마는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한 대목을 보아서, 이 거듭난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그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행 8:12-16)
사람이 거듭나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만으로는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그는 아직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완전히 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성서에 말씀한 대로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세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듭날 그 당시에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고넬료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교회가 흠이 없는 정상적인 교회라면 그 신자들이 거듭나면서 곧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렇게 정상적이지 못하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던 사마리아 신자들의 입장과,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기 전 제자들의 입장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세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생득권(生得權)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많은 신자들이 이 생득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실제로 체험하는 소유물로 삼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잠재적으로는 성령 세례를 받고 있으나 경험적으로는 그러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거듭날 수는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는 수도 있다. 성령 세례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분명히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교회에도 거듭나서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성령의 세례는 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세례는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뿐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할 준비를 하게하고 그 일에 적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를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 세례의 주요한 목적은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 마음속에 새롭고도 놀라운 기쁨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령부흥회, 사경회, 강습회 등에서 놀라운 경험과 큰 기쁨을 얻었으며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주의하여 보면 전이나 별로 다름없이 목사나 교회에 별로 협력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전보다 더 무용(無用)하게 되며 말썽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영혼을 사랑하는 생각과 구원하는 일에 더 힘쓰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성령 세례는 받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확언하건대 성령 세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자격이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이 자격을 얻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다.
2) 성령 세례의 결과
성령세례의 결과는 곧 권능(權能)이다.(행 1:8) 그것은 하나님에게 부르심 받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에 합당하며 성령 세례를 받기만 한다면 그의 생활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권능이 누구에게나 다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전 12:4-13) 여기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사용된 “여러 가지”와 “어떤 이에게”는 성령 세례는 하나이지만 결과는 여러 모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은사는 각기 그 부르심을 받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사상과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는 사상은 전혀 비성서적이요 반성서적이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웨슬레, 찰스 피니, 디엘 무디 등과 같이 전도자의 은사를 받는 것이라는 사상도 비(非)성서적이다. 특히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전도자의 권능을 가지게 된다는 그릇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죄악으로 이끌어가기 쉽다.
①실망이다. - 이는 절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는 수도 있다. 어떤 스코틀란드의 고임금(高賃金) 조선(造船)기술자가 성령의 세례에 대한 설교를 듣고 권능 있는 전도자가 되기를 구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세례를 받고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미네소타주로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그를 전도자로 부르시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전도의 길을 열지 못하고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렀다.
어느 주일 아침 그는 미네아폴리스 교회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사역할 일의 선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위스콘신주의 미개척지에서 주일학교 선교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열어 주신 사업을 하기 위하여 나아갔을 때에 그가 원하던 바로 그 은사를 받게 되었다.
②외람(猥濫)된 생각이다. - 이는 전도자가 되려면 성령 세례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도자로서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전도자로서 사역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할 수 있을만한 성서 지식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전도자로서의 권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③무관심한 태도이다. - 이는 셋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성령 세례는 목사나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이니 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겠지만, 나는 집에서 자녀나 키우는 것이 할 일이니 성령 세례가 필요 없다는 등의 생각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나 성서는 신자로서 전도사업 하는 데만 적합한 것이 아니다. “자녀들을 주 안에서 양육하고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하여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우리가 받을 특별한 은사나 나타내주심을 결정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즉 우리가 받기 원하는 은사와 사역을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그 선택된 은사와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택하신 은사대로 우리를 합당하게 만드시도록 간구하며, 성령께서 택하신 그 일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만드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가장 통탄할 일은 자녀들이 부모의 뒤를 따라서 자라나지 못하고 전혀 불신앙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 된 자로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자녀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권능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권능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 세례를 확실히 받는 일이다.
6. 성령 세례의 필요성
1)어떤 사람에게 성령 세례가 필요한가 - 눅 24:45-49
주님께서는 사역을 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기 전에는 그 일을 착수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준비는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며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인데, 이는 곧 성령 세례를 가리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에 있었던 가장 훌륭한 신학교에서 3년 이상을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본 것,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전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이 마련되기까지는 한 걸음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절대적인 한 가지는 바로 성령 세례를 받는 그 일이다. 여기에 “유(留)하다”라는 말은 직역(直譯)하면 “앉는다”는 뜻이다. 즉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앉아 있으라”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중대한 말씀인가.
성령 세례를 받아 이를 체험하지도 않고 복음전도사업을 착수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오늘날 교회는 일정기간의 연수 후에 그에게 안수하고 성직자로 일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준비되었는가? 우리에게는 목사후보생들을 성직자로 임명하기 전에 “그대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웠음을 확신 하는가” 즉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확신 하는가”를 물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이를 확신하지 못하다면 “그대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앉아 있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주님께서도 분명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공적(公的) 사업을 시작함을 용납하지 않으셨다.(행 10:38, 눅 3:21-22, 4:1) 이러할진대 우리가 능력을 입고 그것을 체험기도 전에 주님의 사역에 봉사함을 착수한다는 것이 될 말인가? 사도들에게 요구하셨던 바와 같이, 주님 자신이 취하셨던 태도와 같이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것을 체험하기까지는 주님을 위한 봉사를 감히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이 신설된 교회에 갈 때에 그들이 언제나 첫째로 살펴본 일은 신자들이 다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신자들이 확실히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음을 발견하였음에서이다.(행 8:12-17, 19:1-6) 그러므로 봉사를 하려면 중생케 하시는 권능과 심령 속에 내재하시는 존재자로서의 성령을 받을 뿐 아니라 능력을 입히움, 곧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비상한 사태를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충만함을 받았지만 또 다시 충만함을 받았다.(행 2:4, 4:8) 원어로서 “충만하다”의 시상(時狀)을 보면 바로 현재에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무리 분명하고 놀라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범하기 쉬운 과오는 과거에 받은 성령 세례의 능력만 가지고 그대로 사역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그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무디 전도자는 늘 말하기를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과연 사역에서 새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시시(時時)로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기름부음 받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눅 11-13장)
그런데 성령을 새로 충만하게 하는 것과 성령 세례를 새롭게 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세례라는 말에는 처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서에는 성령을 새로 충만하게 받는 것을 세례라는 말로 표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언제나 개인이 처음 맛보는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령 세례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용어의 정확한 뜻에 구속(拘束)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용어의 뜻을 다시 달리 해석하더라도 사역의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새로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2)누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행 2:39)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여기서 약속이라는 말은 구원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그들의 자녀를 구원할 것을 언약하신 특권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성령의 선물(성령 세례)을 주실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 해석일까? 이에 대해서 성서해석자들은 두 가지의 일반적인 해석법을 사용한다.
①사용된 용어에 의한 방법
성서에 쓰인 단어의 정확한 뜻은 어원학적(語源學的)으로 결정되는 일은 별로 없고 대개는 그 용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행 2:39에 쓰인 약속이라는 말은 행 1:4-5에 의해 성령이 세례를 주실 것을 말한다. 2:33에서도 이는 “약속하신 성령”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2:39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의 세례를 나타내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②문맥에 의한 방법
여러 가지 해석의 방법이 나올 경우, 그 구절의 전후에 나오는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해석함을 말한다. 성서 말씀은 한 구절도 따로 된 말씀은 없고 다 서로 연결되어 꼭 놓여져야 할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38절에서 베드로는 전에 자기가 말한 약속이 무엇임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이 약속은 틀림없이 성령의 선물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용법으로나 문맥상으로나 39절의 약속이라는 말은 성령 세례를 가리킴이 의심할 여지도 없다. 또한 여기서 “너희”, “너희 자녀”라는 말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아주 상관도 없다. 그런데 그 다음에 “모든 먼 데 사람”,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의 표현을 통해서 성령의 세례는 온 교회사를 통해서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베푸시는 것임이 분명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유업(遺業)이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그의 유업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다.
우리가 이 교리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게만 되면 의심 없이 받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가장 중대한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고 따라서 마땅히 주님께로 인도할 영혼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직자 중에는 잘못된 것을 한 마디도 남에게 전하지 않거니와 구원의 진리도 또한 전혀 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흔히 본다. 오늘날은 이단설을 한 마디도 말하는 일이 없거니와 구원의 진리도 전혀 전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어찌 많은지 알 수 없다. 얼마 전에 일간신문에 저명하다는 세 목사의 설교 제목이 예고되었는데, “애란인의 지혜”, “축구시합”, “나의 장모”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역사할 수 있는 신성한 강단에 서서 그 목사들에 대하여 어찌 근심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걱정되는 것은 복음을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하고 있는 교역자들이다.(고전 2:4) 가장 건전하고 가장 훌륭하게 정통 설교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 청중으로 하여금 지옥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권능 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되풀이 하여 성령의 영광스러운 권능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7.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
1)구원을 받아야 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우리가 성령 세례를 은사로 받기 원한다면 일곱 가지의 마땅히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이 일곱 가지 단계는 누구나 다 밟을 수 있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이며, 또 이 일곱 가지만 행한다면 누구든지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의 단계는 행 2:38에서 다 찾아낼 수 있다.
1단계 - “회개하여”
회개란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변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변화 및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이다. 이 구절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던 마음의 태도로부터 예수를 구주와 주로 모셔 들이는 마음으로 변화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구주(救主)로 모셔 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출석, 성경통독, 세례, 성찬, 십일조, 구제, 종교생활의 노력 등이 근거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직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롬 3:20)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다든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바에 근거를 두고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지신 그 공로에 전혀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고 성령 세례를 받을 첫 단계를 밟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는 첫 단계는 갈보리 산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업과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하셨음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예수를 모셔 들이는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서에 여러 번 반복하여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곧 의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소유물인 성령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에 인(印)을 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거짓교사들의 교훈을 들은 갈라디아 신자들은 모두 의혹에 빠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매우 분개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로 갔던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 그것은 이 거짓 교사들이 잠시 동안은 갈라디아 신자들을 혼란시켰지만 결국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장 위대한 교리를 밝혀준(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서보다 더 훌륭함) 동기(動機)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제일 먼저 아브라함 자신도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갈라디아 신자들의 주의(主意)를 환기시켰다.(갈 3:6, 롬 4:11) 둘째로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경험을 들어서 호소한다.(갈 3:2) 그들은 물론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노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2단계 -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
성령 세례를 받는 둘째 단계는 모든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영과 거룩하지 못한 죄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떠한 죄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만일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데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까닭은 필연코 죄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은 죄란 없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 대한 죄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일에 대한 죄라 할지라도 모두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므로 어찌 크고 작은 것이 있으랴. 죄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싫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모든 죄는 다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한 여자가 성령 세례를 구하며 늦도록 기도만 하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녀의 정신이상을 염려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도무지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기도 중에 그녀의 마음에는 머리에 꽂혀 있는 조그마한 장식핀이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핀을 빼서 내던지며 “에이 저리 가거라”하였다. 그러자 그녀에게 곧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다. 그녀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도록 했던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 곧 죄였던 것이다. 이처럼 성령 세례를 위해 먼저 해야 될 일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고 할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3단계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우리가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였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간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 세례는 은밀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자기의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인 것을 간증하는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2. 죄를 고백해야 한다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지정(指定)하신 방법은 세례이며,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은 물로 세례를 받은 때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공적(公的) 고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印度)에 있을 때에 처음으로 세례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곳에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세례를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손해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캘커타의 한 대학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곧 말 한마디 없이 아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정하신 방법대로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비록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다시 자기가 죄를 버리고 예수를 구주로 모셔 들인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4단계 - 순종이다(행 5:32)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명(命)하시는 한 가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의 중심은 의지에 있다. 순종의 본뜻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조건으로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성령 세례를 받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가정이나 친구나 모든 즐거움을 다 희생하고 멀리 외국 선교사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의 뜻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 세례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지를 완전히 바치지 않는다면, 비록 세상의 끝 날을 알리는 우레 소리가 날 때까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 하더라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께 자기들의 의지를 온전히 맡기면, 어려운 일 또는 전혀 당치않은 일까지도 요구하실까봐 두려워한다. 여자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자기들의 남편을 데려가시거나 다른 어떠한 무서운 일을 행하실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남자들은 또 남자에게 대한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키실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전히 그에게 순종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그 하나님은 분명히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버지로서 내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종이에 적어서 일과표로 만들어 그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을 광명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은혜와 권능을 모두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 중에는 우리 자신들이 하기 원하지 않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가장 행복스런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당신의 소유물이로소이다. 당신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저를 사셨으매 저는 온전히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보내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여 주시며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저를 써주소서”라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에도 전에 성령 세례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 세례를 받게 하신다. 그리고 전에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성령으로 새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우리가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면, 약속대로 충만하게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하나님과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거나 새로 충만함을 받기 바란다.
8. 성령 세례를 당장에 받는 방법
1) 다섯 째 단계 - 요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말씀을 주 예수께서 하실 때는 사 44:3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여기서 “갈한 자에게”라는 말씀이 곧 목말라하는 다섯 째 단계이다. 사람이 참으로 목이 갈할 때는 마치 몸에 있는 모든 숨구멍이 오직 물, 물, 물 하며 부르짖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영적으로 목마를 때에는 그는 오직 성령, 성령, 성령, 오 하나님이시여 성령을 주소서 하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한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아도 그대로 살아 갈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받으려고 갈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보람 있는 봉사를 하려면 성령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어떠한 희생을 해서라도 이것을 얻어야 되겠다고 갈망하는 지경에 이를 때에, 이 성령 세례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편하고 안락한 곳을 떠나 희생적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곳으로 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희생을 당하더라도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가? 만일 이러한 각오가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아무리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보람도 없이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수하게 성령 세례를 갈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 8:20-22에서 마술가인 시몬은 자진해서 많은 돈을 바쳤지만, 그것은 불순한 욕망이었으므로 그는 축복 대신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요히 하나님과 대면하여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기 위한 순결한 욕망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한 보다 더 큰 쾌락이나 권능을 얻기 위한 이기적이며 거룩하지 못한 욕망인지 알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이다.
2)여섯 째 단계 - 천부께 간구함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여섯 째 단계는 천부께 구하는 것이다. 분명한 성령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분명히 구하는 것이다. 이 분명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분명히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은 사도 시대의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교회에 언제나 임재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미 받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은사는 오순절에 온 교회에 주셨다. 그러나 전체적인 교회에 주셨으므로 교회의 각 개인은 각기 자신을 위하여 이 은사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자기 것이 되도록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은 “기도”라고 하였다.
그러면 신자마다 이미 성령을 모시고 있는데(롬 8:9) 무엇 때문에 또 성령을 위해 기도하는가? 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임재하시되 그 임재하심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마음의 한 구석에 숨어서 임재하시는 것과(모든 신자의 마음에 거하시듯)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충만을 받음) 우리의 심령을 온전히 성령이 점령하시고 계시는 것과는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의 온 심령을 점령하심이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 4:31, 8:15-16 등의 기사는 분명 오순절 이후의 일이다. 성서를 바로 상고하게 되면 오순절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신자들이 기도함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거나 또는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한 말씀으로 또한 실증(實證)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성서 말씀을 우리의 경험의 수준으로 낮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의 수준을 성서의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내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분명하고 확실한 경험이다. 성령 세례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로 충만케 하여 주신다는 것을, 마치 물을 마시면 해갈이 되고 음식을 먹으면 배부르게 된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내가 홀로 기도할 때 또는 다른 신자들과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마치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같이 또는 온 몸에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끼는 것같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위에 내리심을 받은 일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한 가지 예로, 무디 전도자의 시카고 집회 중에 어느 목사의 제의(提議)로 시카고의 목사들의 철야 기도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의 집회에는 마귀가 역사하여 그 집회를 망치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방해 때문에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별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특별한 은사를 받기 전에는 헤어지지 않기도 결심하였다. 한 밤중 쯤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셨다. 우리들은 참으로 갈급한 심정으로 합심하여 새벽 두 시까지 기도하였다.
우리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데 홀연히 성령이 강림하셨다. 우리는 모두 말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도한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들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충만함으로써 흐느껴 우는 소리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나는 만일 위를 우러러 본다면 그곳에 성령이 임재하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그때에 당한 일이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각기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그날 이른 아침에 각기 다른 곳으로 헤어져 갔다.
내가 1902년부터 여러 해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중에도 그날 새벽에 특별한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각처로 나가서 주의 사업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 일은 그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능을 받아 가지고 세상 땅 끝까지 나가서 전도함으로써 주님의 사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는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새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3)일곱 째 단계 - 믿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우리가 구하는 성령 세례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도저히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써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열렬히 구하면서도 그 간구함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으니 곧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의 믿음을 가르쳐 주셨다. 즉 손을 내밀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바로 그것을 잡을 수 있게 말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여러 가지 성서를 상고(詳考)하며 연구하였지만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요한 1서를 연구하다가 이 말씀의 뜻을 요한 1서 5장 14절과 15절에서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 할 때에,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확실히 성서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께서 정녕코 들어주실 줄 믿고 또한 알 수 있다. 곧 우리가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감각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처럼 분명히 성서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을 성령 세례에 관한 문제에 관련시킬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한 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은 행 2:39과 눅 11“13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일 5:14-15의 말씀대로 우리는 간구한 바를 얻은 줄로 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 우리가 받은 성령 세례는 우리의 생생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4) 세 가지 문제
①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착수하기 전에 성령 세례를 받은 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신 분명한 말씀에 의하여 아는 것이요, 둘째는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아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거나 못하거나 틀림없이 영감(靈感)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인하여 성령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②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 열흘을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제자들이 왜 열흘을 기다려야 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행 2:1-2은 오순절이 이르기까지는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이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교회를 설립하시기 위하여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오순절 이후이다. 무슨 기다림이 필요하겠는가?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기다림은 필요 없었다. 즉석에서 그들은 믿었으며(행 10:43) 그 자리에 성령께서 그들의 머리 위에 내리셨다. 사울에게도 기다림은 없었다.(행 9:17) 그런데 에베소의 신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이미 임하신 것을 모른 것뿐이었다. 바울이 그것을 알려주고 그래서 그들은 모임이 끝나기 전에 즉석에서 모두 성령 세례를 받았다. 성령 세례를 혹 기다려야 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 까닭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③성령의 은사에는 표시(標示)가 있는가? 아무런 표시도 없다면 성령 세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물론 표시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로 표시의 특성이다. 나는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을 하고서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잘한 것이다. 사도들이 그 사실을 성서에 기록했다면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경험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표시가 성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곧 주님의 사업을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이 생기는 것이다.
오순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방언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자랑삼아서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방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믿게 되었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표시는 억제할 수 없는 권능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근본적 표시가 될 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업을 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표시가 나타나는 시기(時期)이다.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순서대로 말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성서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셋째는 경험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 순서를 말씀, 경험, 믿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참 신앙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믿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때에 별 기쁨도 없었다. 그러나 아기가 출생하였을 때에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믿었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이삭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이유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어떠한 감각이나 경험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된 후에도 확실히 성령 세례를 받기까지는 몇 해 동안 설교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나의 서재에서 성령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며칠동안 계속 기도하였다. 그러자 마귀가 나에게 주일은 닥쳐오는데 네가 그때까지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시험하였다. 나는 “설교할 수 없으니 목사 일을 그만 두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절대로 설교단에 서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일이 닥쳐오기 전에 나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어떠한 특별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하였으나 그러한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일찍이 가져보지 못했던 가장 고요한 시간을 가졌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그처럼 고요히 앉을 수 있게 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까닭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제는 가서 설교를 하라” 내가 만일 그때에 성서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요한일서 5장 14절과 15절 말씀으로 나에게 일러 주셨으련만, 나의 무식함을 긍휼히 여기셔서 나의 영혼에 직접 말씀하여 주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였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하나의 새로운 목사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음을 체험한 지 얼마 후에 하루는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바로 그 방 의자에서 갑자기 마루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의 입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치 무슨 능력에 의하여 입이 놀려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히 믿음으로써 성령을 모셔 들였을 때에 이미 성령 세례는 받았던 것이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1894년 7월 8일, 메사츄세츠주 노드필드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설교하는 시간에 무디 전도자와 함께 산에서 성령 세례를 구하는 모임을 전했다. 그리고 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각자 자기 있는 곳에서 성령의 은사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했다. 그날 오후 세시에 우리 일동은 456명은 무디 전도자 모친의 집 앞에 모였었다.
산 중턱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무디 전도자는 각자가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75명가량의 사람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말하였는데, 그들은 대체로 말하기를 자기들은 세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줄로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간증이 끝나고 무디 전도자는 “우리에게라고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시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하고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청했다.
산중턱으로 올라갈 때는 구름이 산 위에 덮이었는데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구름이 흩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구름이 노드필드 상공에 열흘 동안 덮여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성령이 구름을 뚫고 우리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이여!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건물 위에도 여러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구름이 덮여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자리에 왜 성령의 비가 쏟아져 내리지 않겠는가?
- 이 상 -
讀書後記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성령에 관한 이론들은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모두 긍정적 방향으로 수용해 주고, 그것을 성령의 체험으로 인정해 주려는 무리한 시도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교계(敎界)의 노력은 부족하기만 하다.
성령론 또한 조직신학의 핵심이 되지 못하고 부록정도로만 취급당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다양한 체험들을 일일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하기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행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령론 자체도 다양성을 수용해 주는 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종교적 체험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단(敎團)으로 형성될 정도가 되었다. 신비로운 체험이 없는 자는 신비로운 체험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한수 아래인 것처럼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또 목회 지망자들도 가장 손쉽게 목회에 성공하는 한 방편으로 자유로운 종교체험을 요긴(要緊)하게 생각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체험을 습득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자문(諮問)을 구하며 모방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목회의 성공을 위한 이러한 사태(事態)는, 성경보다 교회를 우위(優位)에 두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이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단체임을 쉽게 잊고서, 교회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있다. 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성령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선언을, 일반 교인들의 종교적 체험을 정당화 해 달라는 요구에 밀려서, 양보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토레이 목사의 성령론은 종교적 체험을 성경의 선언에 거울처럼 비추어 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의 정욕을 죽일 때에 한해서 성령의 열매는 맺히도록 되어 있다.(갈5:16-18)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십자가의 운명을 답습(踏襲)하도록 하신다. 바른 고난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한 상태이다.(벧전 2:21, 4:14) 이에 대해서 토레이는 말한다. “우리가 심령 속에 이 성령의 샘을 가졌다면 도저히 세속적인 유쾌한 일에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의 수정 같은 맑은 샘이 있다면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흙탕물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쾌락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이다”(P 103)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 경험은 온 천지를 향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당했던 사건을 오고 오는 역사 속에 재현시켜 모든 인간 역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자신과 똑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땅 끝까지 흩어 놓기 위한 종말적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령의 강림과 체험을 현세기복주의(現世祈福主義)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공지상주의(成功至上主義)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령을 교회성장이라는 세속적 욕심을 이루어 주는 무속종교의 신적(神的) 힘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이야말로 성령 훼방죄가 아닌가?
“우리를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세례의 주요한 목적이 아니다...(중략)...성령세례의 근본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P 121) 그렇다 폭발적인 성령강림과 그 체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 형상은 예수님의 고난도 함께 수용하는 운명 그 자체를 뜻한다.
종교적, 사업적 욕심을 정당화 해주는 오늘의 사이비(似而非) 성령 운동을 보면서, 우리는 메시야적인 고난의 심정으로 이것들을 탄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성령의 마음을 가진 성령의 사람들이다.
5. 성령 세례의 의의(意義)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니”,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시니”, “성령의 선물”,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등의 말씀들은 모두가 같은 체험에서 나온 말들이고, 현재에도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하고 계시다.
그리고 성서 저자(著者)들이 가졌던 경험을 내 자신은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이 경험을 얻으려고 힘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므로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었고, 변화된 그리스도인, 교역자(敎役者)가 된 것이다.
1)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①성령 세례는 사람이 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는 한 가지 역력(歷歷)한 경험이다.
성령의 세례는 자기가 그 세례를 받은 여부(與否)를 알 수 있는 확실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언제까지 기다리며 또 전도사업을 시작할 날이 언제임을 사도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행 1:4-5) 바울은 에베소 성(城)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 주심을 듣지도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중에는 한 인격적인 성령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은 성령이 계심을 알았고, 성령 세례에 대한 분명한 약속도 알았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분명히 성령 세례를 받도록 하기에 힘썼다. 근래에 와서는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도 많이 하는데 모두가 막연하고 불확실하다. 성령과 세례는 이미 받았으면서도 성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성령과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②성령 세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덧붙여서 하여 주시는 역사이다.
거듭난다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거듭난 사람들이었다.(행 1:5) 주님께서 그들을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단언(斷言)하셨기 때문이다.(요 15:3) 우리는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말씀에 대한 답변을 벧전 1:23에서 볼 수 있다. 이 성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이미 거듭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성령 세례는 받지 못한 것이었다.
빌립의 복음 전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무리 중에는 거듭난 사람이 적어도 얼마는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한 대목을 보아서, 이 거듭난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그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행 8:12-16)
사람이 거듭나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만으로는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그는 아직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완전히 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성서에 말씀한 대로 “성령의 은사”, “성령의 세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듭날 그 당시에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고넬료의 집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교회가 흠이 없는 정상적인 교회라면 그 신자들이 거듭나면서 곧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렇게 정상적이지 못하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던 사마리아 신자들의 입장과,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기 전 제자들의 입장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세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생득권(生得權)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많은 신자들이 이 생득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실제로 체험하는 소유물로 삼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잠재적으로는 성령 세례를 받고 있으나 경험적으로는 그러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거듭날 수는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는 수도 있다. 성령 세례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분명히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 교회에도 거듭나서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성령의 세례는 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세례는 우리들을 개인적으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뿐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할 준비를 하게하고 그 일에 적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우리를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 세례의 주요한 목적은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 마음속에 새롭고도 놀라운 기쁨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심령부흥회, 사경회, 강습회 등에서 놀라운 경험과 큰 기쁨을 얻었으며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주의하여 보면 전이나 별로 다름없이 목사나 교회에 별로 협력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전보다 더 무용(無用)하게 되며 말썽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영혼을 사랑하는 생각과 구원하는 일에 더 힘쓰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성령 세례는 받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확언하건대 성령 세례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자격이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이 자격을 얻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다.
2) 성령 세례의 결과
성령세례의 결과는 곧 권능(權能)이다.(행 1:8) 그것은 하나님에게 부르심 받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에 합당하며 성령 세례를 받기만 한다면 그의 생활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권능이 누구에게나 다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고전 12:4-13) 여기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사용된 “여러 가지”와 “어떤 이에게”는 성령 세례는 하나이지만 결과는 여러 모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은사는 각기 그 부르심을 받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사상과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는 사상은 전혀 비성서적이요 반성서적이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웨슬레, 찰스 피니, 디엘 무디 등과 같이 전도자의 은사를 받는 것이라는 사상도 비(非)성서적이다. 특히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전도자의 권능을 가지게 된다는 그릇된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큰 죄악으로 이끌어가기 쉽다.
①실망이다. - 이는 절망의 지경에 이르게 하는 수도 있다. 어떤 스코틀란드의 고임금(高賃金) 조선(造船)기술자가 성령의 세례에 대한 설교를 듣고 권능 있는 전도자가 되기를 구했다. 그래서 그는 성령 세례를 받고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미네소타주로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그를 전도자로 부르시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전도의 길을 열지 못하고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렀다.
어느 주일 아침 그는 미네아폴리스 교회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사역할 일의 선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위스콘신주의 미개척지에서 주일학교 선교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열어 주신 사업을 하기 위하여 나아갔을 때에 그가 원하던 바로 그 은사를 받게 되었다.
②외람(猥濫)된 생각이다. - 이는 전도자가 되려면 성령 세례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도자로서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전도자로서 사역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할 수 있을만한 성서 지식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전도자로서의 권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③무관심한 태도이다. - 이는 셋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성령 세례는 목사나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이니 그들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겠지만, 나는 집에서 자녀나 키우는 것이 할 일이니 성령 세례가 필요 없다는 등의 생각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나 성서는 신자로서 전도사업 하는 데만 적합한 것이 아니다. “자녀들을 주 안에서 양육하고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하여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우리가 받을 특별한 은사나 나타내주심을 결정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즉 우리가 받기 원하는 은사와 사역을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그 선택된 은사와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택하신 은사대로 우리를 합당하게 만드시도록 간구하며, 성령께서 택하신 그 일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만드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가장 통탄할 일은 자녀들이 부모의 뒤를 따라서 자라나지 못하고 전혀 불신앙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모 된 자로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자녀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권능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권능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 세례를 확실히 받는 일이다.
6. 성령 세례의 필요성
1)어떤 사람에게 성령 세례가 필요한가 - 눅 24:45-49
주님께서는 사역을 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기 전에는 그 일을 착수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준비는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며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인데, 이는 곧 성령 세례를 가리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에 있었던 가장 훌륭한 신학교에서 3년 이상을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본 것,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들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전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이 마련되기까지는 한 걸음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절대적인 한 가지는 바로 성령 세례를 받는 그 일이다. 여기에 “유(留)하다”라는 말은 직역(直譯)하면 “앉는다”는 뜻이다. 즉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앉아 있으라”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중대한 말씀인가.
성령 세례를 받아 이를 체험하지도 않고 복음전도사업을 착수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오늘날 교회는 일정기간의 연수 후에 그에게 안수하고 성직자로 일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준비되었는가? 우리에게는 목사후보생들을 성직자로 임명하기 전에 “그대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웠음을 확신 하는가” 즉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확신 하는가”를 물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이를 확신하지 못하다면 “그대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앉아 있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주님께서도 분명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공적(公的) 사업을 시작함을 용납하지 않으셨다.(행 10:38, 눅 3:21-22, 4:1) 이러할진대 우리가 능력을 입고 그것을 체험기도 전에 주님의 사역에 봉사함을 착수한다는 것이 될 말인가? 사도들에게 요구하셨던 바와 같이, 주님 자신이 취하셨던 태도와 같이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것을 체험하기까지는 주님을 위한 봉사를 감히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이 신설된 교회에 갈 때에 그들이 언제나 첫째로 살펴본 일은 신자들이 다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신자들이 확실히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음을 발견하였음에서이다.(행 8:12-17, 19:1-6) 그러므로 봉사를 하려면 중생케 하시는 권능과 심령 속에 내재하시는 존재자로서의 성령을 받을 뿐 아니라 능력을 입히움, 곧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비상한 사태를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충만함을 받았지만 또 다시 충만함을 받았다.(행 2:4, 4:8) 원어로서 “충만하다”의 시상(時狀)을 보면 바로 현재에 충만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무리 분명하고 놀라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 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범하기 쉬운 과오는 과거에 받은 성령 세례의 능력만 가지고 그대로 사역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그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무디 전도자는 늘 말하기를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과연 사역에서 새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시시(時時)로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기름부음 받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눅 11-13장)
그런데 성령을 새로 충만하게 하는 것과 성령 세례를 새롭게 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세례라는 말에는 처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서에는 성령을 새로 충만하게 받는 것을 세례라는 말로 표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언제나 개인이 처음 맛보는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령 세례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용어의 정확한 뜻에 구속(拘束)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용어의 뜻을 다시 달리 해석하더라도 사역의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새로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2)누가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행 2:39)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여기서 약속이라는 말은 구원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그들의 자녀를 구원할 것을 언약하신 특권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성령의 선물(성령 세례)을 주실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 해석일까? 이에 대해서 성서해석자들은 두 가지의 일반적인 해석법을 사용한다.
①사용된 용어에 의한 방법
성서에 쓰인 단어의 정확한 뜻은 어원학적(語源學的)으로 결정되는 일은 별로 없고 대개는 그 용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행 2:39에 쓰인 약속이라는 말은 행 1:4-5에 의해 성령이 세례를 주실 것을 말한다. 2:33에서도 이는 “약속하신 성령”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2:39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의 세례를 나타내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②문맥에 의한 방법
여러 가지 해석의 방법이 나올 경우, 그 구절의 전후에 나오는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해석함을 말한다. 성서 말씀은 한 구절도 따로 된 말씀은 없고 다 서로 연결되어 꼭 놓여져야 할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38절에서 베드로는 전에 자기가 말한 약속이 무엇임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이 약속은 틀림없이 성령의 선물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용법으로나 문맥상으로나 39절의 약속이라는 말은 성령 세례를 가리킴이 의심할 여지도 없다. 또한 여기서 “너희”, “너희 자녀”라는 말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아주 상관도 없다. 그런데 그 다음에 “모든 먼 데 사람”,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의 표현을 통해서 성령의 세례는 온 교회사를 통해서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베푸시는 것임이 분명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유업(遺業)이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그의 유업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다.
우리가 이 교리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게만 되면 의심 없이 받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가장 중대한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고 따라서 마땅히 주님께로 인도할 영혼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직자 중에는 잘못된 것을 한 마디도 남에게 전하지 않거니와 구원의 진리도 또한 전혀 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흔히 본다. 오늘날은 이단설을 한 마디도 말하는 일이 없거니와 구원의 진리도 전혀 전하지 않는 교역자들이 어찌 많은지 알 수 없다. 얼마 전에 일간신문에 저명하다는 세 목사의 설교 제목이 예고되었는데, “애란인의 지혜”, “축구시합”, “나의 장모”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역사할 수 있는 신성한 강단에 서서 그 목사들에 대하여 어찌 근심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걱정되는 것은 복음을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하고 있는 교역자들이다.(고전 2:4) 가장 건전하고 가장 훌륭하게 정통 설교를 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 청중으로 하여금 지옥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권능 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되풀이 하여 성령의 영광스러운 권능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7.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
1)구원을 받아야 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우리가 성령 세례를 은사로 받기 원한다면 일곱 가지의 마땅히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이 일곱 가지 단계는 누구나 다 밟을 수 있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이며, 또 이 일곱 가지만 행한다면 누구든지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의 단계는 행 2:38에서 다 찾아낼 수 있다.
1단계 - “회개하여”
회개란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변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변화 및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이다. 이 구절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던 마음의 태도로부터 예수를 구주와 주로 모셔 들이는 마음으로 변화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구주(救主)로 모셔 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출석, 성경통독, 세례, 성찬, 십일조, 구제, 종교생활의 노력 등이 근거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아직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고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롬 3:20)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다든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바에 근거를 두고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지신 그 공로에 전혀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고 성령 세례를 받을 첫 단계를 밟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는 첫 단계는 갈보리 산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업과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하셨음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예수를 모셔 들이는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서에 여러 번 반복하여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곧 의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소유물인 성령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에 인(印)을 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거짓교사들의 교훈을 들은 갈라디아 신자들은 모두 의혹에 빠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매우 분개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로 갔던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 그것은 이 거짓 교사들이 잠시 동안은 갈라디아 신자들을 혼란시켰지만 결국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장 위대한 교리를 밝혀준(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서보다 더 훌륭함) 동기(動機)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제일 먼저 아브라함 자신도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갈라디아 신자들의 주의(主意)를 환기시켰다.(갈 3:6, 롬 4:11) 둘째로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경험을 들어서 호소한다.(갈 3:2) 그들은 물론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노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2단계 -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
성령 세례를 받는 둘째 단계는 모든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영과 거룩하지 못한 죄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떠한 죄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만일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데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까닭은 필연코 죄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은 죄란 없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 대한 죄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일에 대한 죄라 할지라도 모두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므로 어찌 크고 작은 것이 있으랴. 죄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싫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모든 죄는 다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한 여자가 성령 세례를 구하며 늦도록 기도만 하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녀의 정신이상을 염려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도무지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기도 중에 그녀의 마음에는 머리에 꽂혀 있는 조그마한 장식핀이 떠올랐다. 그녀는 머리핀을 빼서 내던지며 “에이 저리 가거라”하였다. 그러자 그녀에게 곧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다. 그녀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도록 했던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 곧 죄였던 것이다. 이처럼 성령 세례를 위해 먼저 해야 될 일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고 할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3단계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우리가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였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간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 세례는 은밀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자기의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인 것을 간증하는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2. 죄를 고백해야 한다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지정(指定)하신 방법은 세례이며,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은 물로 세례를 받은 때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공적(公的) 고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印度)에 있을 때에 처음으로 세례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곳에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세례를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손해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캘커타의 한 대학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곧 말 한마디 없이 아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인도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정하신 방법대로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비록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다시 자기가 죄를 버리고 예수를 구주로 모셔 들인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4단계 - 순종이다(행 5:32)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명(命)하시는 한 가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뿐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의 중심은 의지에 있다. 순종의 본뜻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조건으로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성령 세례를 받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가정이나 친구나 모든 즐거움을 다 희생하고 멀리 외국 선교사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의 뜻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 세례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지를 완전히 바치지 않는다면, 비록 세상의 끝 날을 알리는 우레 소리가 날 때까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기도한다 하더라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께 자기들의 의지를 온전히 맡기면, 어려운 일 또는 전혀 당치않은 일까지도 요구하실까봐 두려워한다. 여자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자기들의 남편을 데려가시거나 다른 어떠한 무서운 일을 행하실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남자들은 또 남자에게 대한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키실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전히 그에게 순종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그 하나님은 분명히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버지로서 내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종이에 적어서 일과표로 만들어 그에게 주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을 광명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은혜와 권능을 모두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 중에는 우리 자신들이 하기 원하지 않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가장 행복스런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당신의 소유물이로소이다. 당신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저를 사셨으매 저는 온전히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보내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여 주시며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저를 써주소서”라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에도 전에 성령 세례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 세례를 받게 하신다. 그리고 전에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성령으로 새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우리가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면, 약속대로 충만하게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하나님과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거나 새로 충만함을 받기 바란다.
8. 성령 세례를 당장에 받는 방법
1) 다섯 째 단계 - 요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말씀을 주 예수께서 하실 때는 사 44:3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여기서 “갈한 자에게”라는 말씀이 곧 목말라하는 다섯 째 단계이다. 사람이 참으로 목이 갈할 때는 마치 몸에 있는 모든 숨구멍이 오직 물, 물, 물 하며 부르짖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영적으로 목마를 때에는 그는 오직 성령, 성령, 성령, 오 하나님이시여 성령을 주소서 하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한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아도 그대로 살아 갈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받으려고 갈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보람 있는 봉사를 하려면 성령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어떠한 희생을 해서라도 이것을 얻어야 되겠다고 갈망하는 지경에 이를 때에, 이 성령 세례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편하고 안락한 곳을 떠나 희생적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곳으로 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희생을 당하더라도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가? 만일 이러한 각오가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아무리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보람도 없이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수하게 성령 세례를 갈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 8:20-22에서 마술가인 시몬은 자진해서 많은 돈을 바쳤지만, 그것은 불순한 욕망이었으므로 그는 축복 대신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요히 하나님과 대면하여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기 위한 순결한 욕망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한 보다 더 큰 쾌락이나 권능을 얻기 위한 이기적이며 거룩하지 못한 욕망인지 알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물어 볼 것이다.
2)여섯 째 단계 - 천부께 간구함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여섯 째 단계는 천부께 구하는 것이다. 분명한 성령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분명히 구하는 것이다. 이 분명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분명히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은 사도 시대의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교회에 언제나 임재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미 받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은사는 오순절에 온 교회에 주셨다. 그러나 전체적인 교회에 주셨으므로 교회의 각 개인은 각기 자신을 위하여 이 은사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자기 것이 되도록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은 “기도”라고 하였다.
그러면 신자마다 이미 성령을 모시고 있는데(롬 8:9) 무엇 때문에 또 성령을 위해 기도하는가? 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임재하시되 그 임재하심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마음의 한 구석에 숨어서 임재하시는 것과(모든 신자의 마음에 거하시듯)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충만을 받음) 우리의 심령을 온전히 성령이 점령하시고 계시는 것과는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의 온 심령을 점령하심이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 4:31, 8:15-16 등의 기사는 분명 오순절 이후의 일이다. 성서를 바로 상고하게 되면 오순절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신자들이 기도함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거나 또는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한 말씀으로 또한 실증(實證)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성서 말씀을 우리의 경험의 수준으로 낮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의 수준을 성서의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내게 있어서 성령 세례는 분명하고 확실한 경험이다. 성령 세례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로 충만케 하여 주신다는 것을, 마치 물을 마시면 해갈이 되고 음식을 먹으면 배부르게 된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내가 홀로 기도할 때 또는 다른 신자들과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마치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같이 또는 온 몸에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끼는 것같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위에 내리심을 받은 일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한 가지 예로, 무디 전도자의 시카고 집회 중에 어느 목사의 제의(提議)로 시카고의 목사들의 철야 기도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의 집회에는 마귀가 역사하여 그 집회를 망치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방해 때문에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별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특별한 은사를 받기 전에는 헤어지지 않기도 결심하였다. 한 밤중 쯤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허락하여 주셨다. 우리들은 참으로 갈급한 심정으로 합심하여 새벽 두 시까지 기도하였다.
우리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데 홀연히 성령이 강림하셨다. 우리는 모두 말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도한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들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충만함으로써 흐느껴 우는 소리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나는 만일 위를 우러러 본다면 그곳에 성령이 임재하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그때에 당한 일이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각기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그날 이른 아침에 각기 다른 곳으로 헤어져 갔다.
내가 1902년부터 여러 해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중에도 그날 새벽에 특별한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각처로 나가서 주의 사업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 일은 그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능을 받아 가지고 세상 땅 끝까지 나가서 전도함으로써 주님의 사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는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새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3)일곱 째 단계 - 믿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우리가 구하는 성령 세례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도저히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써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하여 열렬히 구하면서도 그 간구함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 있으니 곧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의 믿음을 가르쳐 주셨다. 즉 손을 내밀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바로 그것을 잡을 수 있게 말하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여러 가지 성서를 상고(詳考)하며 연구하였지만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요한 1서를 연구하다가 이 말씀의 뜻을 요한 1서 5장 14절과 15절에서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 할 때에,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확실히 성서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께서 정녕코 들어주실 줄 믿고 또한 알 수 있다. 곧 우리가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감각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처럼 분명히 성서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을 성령 세례에 관한 문제에 관련시킬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한 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은 행 2:39과 눅 11“13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일 5:14-15의 말씀대로 우리는 간구한 바를 얻은 줄로 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 우리가 받은 성령 세례는 우리의 생생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4) 세 가지 문제
①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착수하기 전에 성령 세례를 받은 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신 분명한 말씀에 의하여 아는 것이요, 둘째는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아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거나 못하거나 틀림없이 영감(靈感)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인하여 성령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②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 열흘을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제자들이 왜 열흘을 기다려야 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행 2:1-2은 오순절이 이르기까지는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이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교회를 설립하시기 위하여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오순절 이후이다. 무슨 기다림이 필요하겠는가?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기다림은 필요 없었다. 즉석에서 그들은 믿었으며(행 10:43) 그 자리에 성령께서 그들의 머리 위에 내리셨다. 사울에게도 기다림은 없었다.(행 9:17) 그런데 에베소의 신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이미 임하신 것을 모른 것뿐이었다. 바울이 그것을 알려주고 그래서 그들은 모임이 끝나기 전에 즉석에서 모두 성령 세례를 받았다. 성령 세례를 혹 기다려야 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 까닭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③성령의 은사에는 표시(標示)가 있는가? 아무런 표시도 없다면 성령 세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물론 표시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로 표시의 특성이다. 나는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을 하고서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잘한 것이다. 사도들이 그 사실을 성서에 기록했다면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경험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표시가 성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곧 주님의 사업을 봉사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이 생기는 것이다.
오순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방언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자랑삼아서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방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믿게 되었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표시는 억제할 수 없는 권능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근본적 표시가 될 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업을 함에 있어서 새로운 권능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표시가 나타나는 시기(時期)이다.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순서대로 말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성서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셋째는 경험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 순서를 말씀, 경험, 믿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참 신앙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믿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때에 별 기쁨도 없었다. 그러나 아기가 출생하였을 때에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믿었기 때문에 자기 눈으로 이삭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이유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어떠한 감각이나 경험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된 후에도 확실히 성령 세례를 받기까지는 몇 해 동안 설교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나의 서재에서 성령 세례를 받게 하여 달라고 며칠동안 계속 기도하였다. 그러자 마귀가 나에게 주일은 닥쳐오는데 네가 그때까지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시험하였다. 나는 “설교할 수 없으니 목사 일을 그만 두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절대로 설교단에 서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일이 닥쳐오기 전에 나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어떠한 특별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하였으나 그러한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일찍이 가져보지 못했던 가장 고요한 시간을 가졌었다. 내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그처럼 고요히 앉을 수 있게 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까닭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제는 가서 설교를 하라” 내가 만일 그때에 성서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요한일서 5장 14절과 15절 말씀으로 나에게 일러 주셨으련만, 나의 무식함을 긍휼히 여기셔서 나의 영혼에 직접 말씀하여 주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였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하나의 새로운 목사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음을 체험한 지 얼마 후에 하루는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바로 그 방 의자에서 갑자기 마루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의 입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치 무슨 능력에 의하여 입이 놀려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히 믿음으로써 성령을 모셔 들였을 때에 이미 성령 세례는 받았던 것이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1894년 7월 8일, 메사츄세츠주 노드필드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설교하는 시간에 무디 전도자와 함께 산에서 성령 세례를 구하는 모임을 전했다. 그리고 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각자 자기 있는 곳에서 성령의 은사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했다. 그날 오후 세시에 우리 일동은 456명은 무디 전도자 모친의 집 앞에 모였었다.
산 중턱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무디 전도자는 각자가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75명가량의 사람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말하였는데, 그들은 대체로 말하기를 자기들은 세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줄로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간증이 끝나고 무디 전도자는 “우리에게라고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시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하고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청했다.
산중턱으로 올라갈 때는 구름이 산 위에 덮이었는데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구름이 흩어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구름이 노드필드 상공에 열흘 동안 덮여있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성령이 구름을 뚫고 우리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이여!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건물 위에도 여러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구름이 덮여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자리에 왜 성령의 비가 쏟아져 내리지 않겠는가?
- 이 상 -
讀書後記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성령에 관한 이론들은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모두 긍정적 방향으로 수용해 주고, 그것을 성령의 체험으로 인정해 주려는 무리한 시도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교계(敎界)의 노력은 부족하기만 하다.
성령론 또한 조직신학의 핵심이 되지 못하고 부록정도로만 취급당고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다양한 체험들을 일일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하기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행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령론 자체도 다양성을 수용해 주는 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종교적 체험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단(敎團)으로 형성될 정도가 되었다. 신비로운 체험이 없는 자는 신비로운 체험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한수 아래인 것처럼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또 목회 지망자들도 가장 손쉽게 목회에 성공하는 한 방편으로 자유로운 종교체험을 요긴(要緊)하게 생각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체험을 습득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자문(諮問)을 구하며 모방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목회의 성공을 위한 이러한 사태(事態)는, 성경보다 교회를 우위(優位)에 두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이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단체임을 쉽게 잊고서, 교회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있다. 교회가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성령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선언을, 일반 교인들의 종교적 체험을 정당화 해 달라는 요구에 밀려서, 양보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토레이 목사의 성령론은 종교적 체험을 성경의 선언에 거울처럼 비추어 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의 정욕을 죽일 때에 한해서 성령의 열매는 맺히도록 되어 있다.(갈5:16-18)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십자가의 운명을 답습(踏襲)하도록 하신다. 바른 고난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한 상태이다.(벧전 2:21, 4:14) 이에 대해서 토레이는 말한다. “우리가 심령 속에 이 성령의 샘을 가졌다면 도저히 세속적인 유쾌한 일에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의 수정 같은 맑은 샘이 있다면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흙탕물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쾌락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이다”(P 103)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 경험은 온 천지를 향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당했던 사건을 오고 오는 역사 속에 재현시켜 모든 인간 역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자신과 똑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땅 끝까지 흩어 놓기 위한 종말적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령의 강림과 체험을 현세기복주의(現世祈福主義)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공지상주의(成功至上主義)로 바꾸어 놓고 있다. 성령을 교회성장이라는 세속적 욕심을 이루어 주는 무속종교의 신적(神的) 힘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이야말로 성령 훼방죄가 아닌가?
“우리를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세례의 주요한 목적이 아니다...(중략)...성령세례의 근본목적은 우리 자신이 행복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에 유용하게 만드는 것이다”(P 121) 그렇다 폭발적인 성령강림과 그 체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 형상은 예수님의 고난도 함께 수용하는 운명 그 자체를 뜻한다.
종교적, 사업적 욕심을 정당화 해주는 오늘의 사이비(似而非) 성령 운동을 보면서, 우리는 메시야적인 고난의 심정으로 이것들을 탄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성령의 마음을 가진 성령의 사람들이다.
R. A. 토레이 著「성령론」1/4
R. A. 토레이 著「성령론」
1~4장 요약
Ⅰ. 성령의 인격
성령께서는 한 인격자이시다. 오늘날 성령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생각이 많은 이유는 성령을 인격자로 인식하지 않고 그 역사(役事)하심만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기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고 극히 실제적이다. 성령이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을 원만히 받지 못한 사람이며 기독교적인 신관(神觀)을 확실히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1)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예배에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성령이 비인격적인 감화력 혹은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령께 드려야 할 예배를 약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과연 우리는 성령께 예배드리는가? 물론 찬송의 가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이론적인 말이나 노래를 한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 노래의 뜻과 힘을 확실히 깨닫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2)성령을 인격자로 아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성령을 한 감화력이나 능력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을 붙잡아서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결국 자만심과 자고심(自高心)과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성령을 받았다고 광신(狂信)하는 나머지 자신을 특별히 뛰어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가지신 인격자라로 믿는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나를 이용하시게 할 수 있을까”라고 소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희생하고 겸손해야 되겠다는 생각 밖에 다른 것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겸손한 태도와 생활은 성서의 위대한 진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3)성령에 대한 인격의 교리는 경험상으로 보아서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신자들이 성령이 한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의 신앙경험과 봉사정신이 전적(全的)으로 변하였음을 간증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제목의 설교를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성령의 인격에 관한 설교이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말하였고, 이에 관하여 서신으로 묻기도 하며 간증도 했다.
2. 성령이 인격자이심을 증명하는 네 가지 사실
1)성령의 인격의 특성이 모두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인격의 특성은 지(知), 정(情), 의(意)이다. 그러나 성령이 인격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과 같이 수족과 이목구비를 가지신 것은 아니다. 모양은 인격의 표시가 아니라 사람의 형체의 표시이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지상 생활이 끝나게 된다면 우리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할 것이다.(고후 5:8) 그러므로 인격의 표시는 신체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있으며, 이해와 느낌과 의지를 가진 실재(實在)가 인격자이다.
①성령께는 지식이 있다(고전 2:11)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는 한 빛으로서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진리를 비추어 주고 더욱 힘있게 인식하게 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진리를 아시고 그 아시는 바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이다.
②성령은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쓰시는 신령한 인격자이시다(고전 12:11)
성령은 단지 우리가 붙잡아서 우리의 뜻대로 이용하는 신령한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으셔서 당신의 뜻대로 쓰시는 신령하신 인격자이시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성령이란 신령한 능력을 얻어서 그들의 뜻대로 이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무식한 우리는 필경 죄악을 짓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붙잡아서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스러우신 뜻대로 이용하실 수 있는 신령한 인격자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③성령의 생각(롬 8:27, 8:7)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마”는 지식, 감정, 의지의 세 가지 관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롬 8:7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또한 육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육신의 도덕적 및 지적(知的) 생활의 일부가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④성령의 사랑(롬 15:30)
성령은 단순한 맹목적인 감화력이나 능력이 아니고 친히 인자(仁慈)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령하신 인격자이다.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성령을 바라보며 “성령이여 저를 사랑하신 당신의 크신 사랑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여 본적이 있는가?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지만 성령의 사랑으로 인하여서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를 찾아내시려고 날마다 나의 뒤를 따르며, 또 내가 그의 말씀을 듣지 아니 하였을 때와 그를 일부러 거역하며 그를 모욕하였을 때에도 나를 잊지 않고 따라다니신다. 또한 정녕코 괴로운 처지까지라도 따라오셔서 나의 미련함을 깨우치고 나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하셔서 바로 내가 구하던 구세주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또한 주님으로 모셔 들일 수 있게 하도록 성공할 때까지 도와주신다.
⑤성령의 지혜로움과 선하심(느 9:20)
지혜로움과 선함이 다 성령의 것이다. 이 구절처럼 인격자이신 성령의 교리를 구약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인격의 교리는 구약에도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교리 또한 구약에서도 수백 번이라도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거의 다 이 교리가 들어있는 것이다.
⑥성령도 근심하신다(엡 4:30)
성령은 죄를 극히 싫어하시는 거룩한 인격자이시다. 우리가 가장 적은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도 거부하시고 물러가시는 인격자이시다. 그러므로 한낱 떠도는 공상일지라도 성령께서 몰래 우리의 마음속에 잠깐 동안이나마 깃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조심하여 우리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을 즐거우시게 하려고 하는 능력 있는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원에서 오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우리의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될 어떤 생각이 나곤 한다. 이때에 생각을 마음속에 그대로 두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은 그 생각을 아시나니 그로 인하여 슬퍼하시리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먼저 가졌던 무익한 잡념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극장이나 댄스홀에 간다면 성령께서도 가실 것이다. 이런 장소가 성령께 알맞은 분위기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성령께서도 반드시 따라가신다. 식구끼리 화투놀이를 한다 할지라도 성령께 알맞은 분위기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안다면 단연 이런 노름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더라도 나만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진실로 모든 문제를 성령의 뜻대로 해결하기 원해야 한다.
2) 인격자만이 행할 수 있는 여러 행동을 성령께서 가지신다
①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달하시는 분이시다(고전 2:10)
성령은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는 빛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통달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인격자이시다. 성령이 인격자가 아니시라면 도저히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②성령은 친히 기도하시는 인격자이시다(롬 8:26)
신자들은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신령하신 두 인격자를 모시고 있다. 한 분은 아버지 앞에서의 성자이시고, 또 한 분은 낮은 땅 위에서의 성령이시다.(요일 2:1, 히 7:25) 1901년 세계일주 여행 시 4만여 명이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아래서 설교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이며 또한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 신기하랴! 물론 지금도 그들이 나를 위하여 모두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남녀 4만명의 기도와 성자 그리스도와 나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해 주시는 보혜사 성령과의 두 신령하신 인격자를 모시는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두 신령하신 인격자를 모시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③성령은 가르치시는 분이시다(요 14:26, 16:12-13)
성령은 살아계신 인격자이신 교사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성서를 연구할 때마다 그 성서의 저자이신 성령을 모시고 우리에게 성서를 해석해 주시며 또 그 참뜻과 중심 사상을 가르쳐 주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가장 훌륭하다는 인간의 교사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으신 교사를 날마다 모실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인격자의 속성만 될 수 있는 속성이 성령의 속성이다(요 14:16-17)
성령은 우리 주 예수의 대신으로 오시는 다른 보혜사로서 표현되어 있다. 만일 주 예수를 대신하여 오시는 다른 분이 단순히 비인격적인 감화력이나 능력이었다면 주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하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신령한 인격자이신 당신은 떠나가시되 대신 당신과 꼭 같이 신령한 인격자이신 다른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가장 귀한 약속 중의 하나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인격자로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며 온갖 위급한 경우에 있어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라는 말은 영어의 comforter 보다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가 보다 고상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위급한 일을 당할 때에 함께 서둘러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와준다는 뜻이다. 또한 요한1서 2:1의 대언자는 advocate로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부름받은”이라는 뜻인데 이 또한 그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떠나실 때까지는 친히 신자들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시어 언제나 도와주시려고 가까이 계신 친구였다. 이때에 제자들은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의례 주님께로 향하였던 것이다.(예 - 주기도문,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떠나가시게 되어 제자들이 낙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 대신 나와 꼭 같이 신령하시고 사랑이 많은 분이 오셔서 너희가 위급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능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일생 동안 아무런 공포의 순간도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시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떠한 위급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어찌 두려워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은 모든 두려움을 없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뉴욕주에 있는 어느 호수가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사경회가 끝난 후 약 4마일 떨어진 사촌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시간에는 폭풍이 불고 있었다. 사촌의 집으로 가는 호수 위의 비탈길은 어둠에 싸여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도랑이 여기저기 패여서 비탈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라 여관으로 되돌아 갈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너는 부흥사경회에서 성령은 인격자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신다고 설교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네 곁에는 지금 성령께서 동행하고 계시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 나는 어둠 속의 4마일을 즐거운 산보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걸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런던 로얄 알버트 교회의 젊은 부인은 어두운 방에 혼자 못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 후 그녀가 편지하기를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캄캄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캄캄한지요. 그러나 그 방은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빛나고 찬란했었습니다”
또 나는 불면증으로 2년 동안이나 암담하고 지긋지긋한 세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에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다가와 불면증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깊이 들게 되었다. 몇 해 동안은 이렇게 잘 지냈다. 그런데 시카고의 성경학교에서 불면증이 재발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전에는 바로 내가 아래층 강의실에서 성령의 인격에 관하여 말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위를 우러러 보며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이시여, 당신은 지금 여기 계시나이다. 무엇이든지 나에게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성령께서는 입을 열어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묘하고도 귀중한 말씀을 들려주시어 나의 영혼을 안정과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 주셨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인격자이신 친구라는 사상은 또한 우리의 고적(孤寂)함을 소멸하여 주신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친구이시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면 일생 동안 아무런 외로운 순간도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한번은 바다에 떠있는 기선(汽船)의 갑판 위에서 밤에 거닐고 있었다. 갑판 위를 혼자 거닐고 있노라니 1만 7천마일 밖에 떨어져 있는 네 아이들의 생각이 나서 문득 마음이 쓸쓸해졌다. 이때에 나는 나의 곁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폭풍이 부는 이 밤에도 나와 함께 갑판 위를 거닐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고적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은 인격을 가진 친구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귀한 진리는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도 이를 없이하여 준다. 오늘날 세상에는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셔서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것만 알면 잠깐이나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인격자이시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가장 큰 능력과 도움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나타난 은사인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 유달리 부끄러움을 타는 성질이 있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면 머리털 끝까지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교회의 기도회에서 말 한마디 못하였다. 나의 초기의 성직(聖職) 생활은 고통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즐거운 날이 돌아왔다. 내가 설교하려고 일어설 때, 나는 보지만 사람들은 볼 수 없다는 다른 한 분이 나의 곁에 계시다는 것과 또 설교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 분에게 있는 것이며, 나로서 해야 될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나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청중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 곁에 서 계신 분으로 하여금 설교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옳은 것만 말씀하실 것이다. 성령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인격자이시다. 아마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다 성령이 인격자이심은 알고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성령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며 그를 인격자로 모시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성령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맡아 보시게 하려고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나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2. 죄인을 회개시키는 성령(요 16:7-11)
1)세상의 죄를 깨우치시는 성령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에 대한 심각한 의식을 일깨워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죄에 관련된 그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과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부흥운동의 큰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거나 또는 나오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 자신이 하셔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에 대하여 눈이 어두우므로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세상의 죄를 깨닫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이론과 설복시킬 수 있는 힘이 강하고 또한 감상적인 이야기라든지 슬픈 노래를 듣고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만 가지고는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설교나 개인 전도에 있어서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잘못은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함에 있어서 우리가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려고 서두르는 것이다.
중앙철도국에서 근무하는 기사(技士)는 한 여전도사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으나 아무 감동도 받지 못했다. 여전도사의 부탁을 받은 나는 그와 이야기하면서 성령께서 친히 당신의 말씀으로 그를 감동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자 십분도 채 못 되어 그 사람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였다. 이것은 신비로울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즉 그 여전도사는 그만 실수하였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실 일을 자기가 하여 자기의 힘으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죄를 깨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시카고시의 무디교회의 목사로 있을 때에, 우리는 교회 운영에 대하여 토의하지 말고 우리를 통회자복하게 하시는 성령을 보내달라고 부르짖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카고에 살며 노름을 하던, 생전에 처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고 하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더니 자기 죄를 모두 사함을 받았다는 기쁨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이와 같이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으려면 우리로서는 전혀 사람을 회개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실 줄 믿고, 그 일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하여 주실 줄 바라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엇보다도 귀중한 일은 성령을 믿는 일이다. 죄를 일깨워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그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행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이다. 음주, 도둑질, 간음, 살인 그 밖의 어떤 부도덕한 짓을 행하는 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성령께서 일깨워주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신 그분을 믿지 않는 그 무서운 죄이다. 이 불신앙은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하고 결정적인 죄이며 견디지 못할 저주받을 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2)성령은 세상으로 하여금 의(義)를 깨닫게 하신다
이 의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여 두신 의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와 그것을 어떻게 씻는 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신 의를 아는 것이다. 이것들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사람들이 죄를 뼈아프게 깨닫게 되면, 심각한 통회(痛悔)가 있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빛이 마음속에 비치어서 사죄하여 주심을 분명히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의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피츠버그의 집회에서 어떤 교인이 심령 부흥을 비방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밭고랑에 거꾸러져 죄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던, 그래서 밭고랑에서 일어나기 전에 구원을 받았던 일을 말했다. 이처럼 사람이 성령에 의하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죄를 통회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여주신다. 그러면 그는 곧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준비해 두신 그 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스코틀란드의 목사가 전국 여행 중에 여관에서 생긴 일이다. 여관 주인은 예배의 인도를 부탁했고, 목사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모일 것을 부탁했다. 한 하녀가 빠졌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목사는 그 불쌍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여종에게 큰 관심을 두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주여, 내 자신을 나에게 보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그 목사는 한 젊은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자는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과 또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나의 모든 죄 짐을 벗어버리고 저는 행복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렇다. 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신 의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3)성령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깨우쳐 주신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은 심판이니 이는 곧 이 세상의 악마의 심판에 의하여 증명된 것이다.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심판에 대한 각성이 요청되는 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개가 장래에 있을 심판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다. 정통파다운 교역자들도 지옥을 잊어버리고 설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교훈할 것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것만을 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왜 우리 목사들이 지옥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을까? 확실히 이에 대하여 설교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설교에 복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에 심판을 믿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구주(救主)를 배척하는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계시로 깨달았다. 그 날부터 나는 조금도 성서에서 가르친 장래의 형벌에 대하여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성령은 신자들을 통해서만 세상을 깨우치신다(요 16:7-8)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그는 당신의 역사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행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은 신자에게 오셔서 그가 임하시는 신자를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회개의 사실은 모두 사람의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라도 사람의 회개를 통하지 않고 된 것이 없다.(고넬료의 회개, 사울의 회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은 다 그 입술을 성령께 바쳐서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누구에게나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달아 알게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여러분의 생활에서 철저히 몰아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기에 조금도 막힘이 없는 통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되 날카롭게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 브라이톤에서 우리 동역자 한 사람이 음식점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다가 식사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전도하려고 기다리다가 주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은 그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시중들고 나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자살했습니다”
우리는 엄숙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하여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 계시면 곧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만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3.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1)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명하시는 성령(요 15:26-27)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또한 성령은 모든 일을 듣고 우리에게 선포하여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개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직접적인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만 우리는 진실하시고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고전 12:3)
성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주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다.(행 5:32, 요 7:7) 이 말씀은 비록 복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요한복음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뜻을 순복시키고 또 복음을 읽을 때까지 자기가 읽는 바를 그의 심령에 해석하여 주실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복음을 한 번이라도 통독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교역자들에게는 흔히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기 위하여 물어보러 오는 사람이 있게 된다. 이때 너무나 상대자가 깨닫지 못할 때는 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둔할까 하고 생각하게 될 때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이다. 그 사람도 다른 일에 대해서는 여간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번이고 싫다 말고 되풀이하여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그 질문하러 온 사람의 심령에 당신의 증거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밝히 나타내려면 우리 자신의 말재간이나 권면의 힘이라든지 또는 자기의 성서 지식이나 그 지식을 이용하는 방법에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혀 무능한 것임을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어 성령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게 하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실 수 있을만한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게 하도록 힘쓸 것이다.
2)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요 3:3-5)
중생의 정의 1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는 것이다.(엡 2:1)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데 성서를 도구로 쓰심은 물론이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성서에 기록된 말씀은 성령께서 사람을 중생하게 하시는 데 이용하시는 도구이며, 중생이 일어나게 하는 데 말씀을 이용하시는 분은 성령뿐이시다.(벧전 1:23, 약 1:18)
그러므로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는 뜻은 책에 기록된 말씀, 곧 단순한 의문은 죽이는 것으로서 사람을 정죄하고 죽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심령, 심비에 하나님의 영이 기록하신 말씀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곧 살아 계신 성령이 오늘날 개인의 심령을 차지하고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에 기록하여 주셔야만 사람이 살아있고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다.
설교나 개인전도나 또는 가르침으로써 아무리 기록된 말씀이나 성서를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나 개인전도나 가르침으로써 사람을 거듭나게 하기 원한다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그에게 개인전도나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성령께서 우리의 상대자의 심령에 가져가게 하시고 또한 우리 자신은 성령께서 당신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의 정의 2
중생은 새로운 성품 곧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이다.(벧후 1:3-4) 왜냐하면 가문이 훌륭하고 부모가 경건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진리에 어두운 마음과(고전 1:14)부패한 애정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땅히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될 것을 미워한다. 또한 우리는 모두 옳지 못한 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롬 8:7)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든 비열한 것이든 간에 이것들은 죄의 본질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기초를 둔 의지는 어떤 것이거나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는 의지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의지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이지적으로, 감성적으로 또는 의지적으로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된다. 먼저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새로운 성품을 받는다. 어느 날 집회에 들어왔던 불신자인 그는 고급 관리였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 사람은 즉석에서 거듭났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그에게 미련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낮과 같이 밝아져서, 일주일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이 진리를 깨우쳐 주려고 힘쓰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를 빛으로 인도하였으며, 그 후 일년이 못되어 복음을 전도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정적(靜的) 성품도 받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좋아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좋아하게 된다. 성서를 날마다 읽기는 하였지만 나는 성서를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거듭난 후부터는 내 마음은 성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무도회, 노름장, 경마장 같은 데 가는 것은 싫어졌고,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와 주일에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후 5:17)
그리고 새로운 뜻도 받게 된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의 의지는 이미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자신의 욕망은 무가치한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이 중요한 일이 된다. 이 성품을 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새로운 성품을 새로 난 사람에게 주시는 데 이용하시는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려고 하면 성서만 읽는 것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서를 읽는 동시에 우리의 모든 뜻을 성령께 바치겠다는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한 단지 기록된 그대로의 복음만은 저주와 죽음을 알려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말씀만 고집하는 이른바 전통적인 교역자나 교사의 전도는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지혜의 권하는 대로 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2:4)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데 필요한 조건이 우리에게 구비(具備)만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역사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심령은 밭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종자이며, 교역자와 교사와 개인 전도자들은 씨 뿌리는 사람이다. 일을 행하시도록 그에게 맡긴다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뿌린 씨에 생명을 주실 것이며, 그들의 심령은 신앙으로 덮이어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게 된다. 나는 사람이 갑자기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중생도 믿는 바이다. 회개란 외형적인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생은 사람의 심령과 정신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속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로서 생명을 받고 새로운 성품을 받는 것이 중생이다.
나는 사람의 돌연한 중생, 곧 속사람이 갑자기 온전히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 성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나는 수없이 이러한 사실들을 목격하였다. 나와 함께 몇 해 동안 동역했던 무디 교회의 부목사인 윌리엄 에스 제이콥은 42세가 되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평판이 있는 심한 죄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어느 날 밤, 복음 전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회개하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일찍이 가져 본 일이 없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될 만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우리가 어찌 돌연적인 중생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기록된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성령께서 중생의 역사를 하시는 권능을 믿으며 또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 속에 뿌려진 말씀에 생명을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셨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발로 서서 설교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한, 지구 위에 사는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단념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성령의 권능 안에서 설교하며 가르치려고 결심하고 있는 바이다.
이 신생(新生)의 교리는 영광스러운 교리이다. 이것은 거짓된 소망을 쓸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네가 아무리 철저하게 생활을 혁신하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한 “온후한 인격과 친절한 마음과 관대한 동정심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리는 종교의 외형적인 것으로 자신을 가지는 사람에게도 “그대는 모든 외형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거듭나야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거듭났는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거듭날 수 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준비만 하고 있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으며, 남은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자리의 준비뿐이다.
4. 완전하고 영원한 만족
1)완전한 만족(요 4:14)
우리는 주님께서 어떠한 경우에 이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제6시”라는 말을 대낮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연구의 결과 요한이 복음을 기록하던 에베소에서는 지금의 오후 여섯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주님은 온종일 한 도보의 여행길에 너무도 피곤하셔서 샘물가에 앉으셨다. 그런데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을 보시고는 주님께서는 영혼을 구하기 원하시는 갈증을 느끼셨다.
여기서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또 다시 목마르리라”고 하셨다. 진실로 옳은 말씀이다. 모든 세속적인 만족과 기쁨의 샘은 그것을 아무리 깊이 들여 마셨다 하더라도 다시 목마르게 되는 것이다. 명예, 권세, 향락, 과학, 예술 등의 샘물을 아무리 마신다 해도 다시 목마르게 된다. 즉 하나도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계속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물은 성령이며 주님을 믿는 자와 선물을 간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을 자기의 심령 속에 계실 분으로 진정 모셔 들이는 사람은 완전하며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된다.
기쁨의 근원을 우리의 자신 속에 둔다는 것, 곧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지체나 또는 우리의 소유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 기쁨의 원천을 가진다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는 환경이나 사정이나 또는 재물이 있고 없는 데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나 기쁠 것이다. 자기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이 들릴 때에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하더라도 꼭 같이 기뻐할 것이다.
수년 전에 내 아내와 내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당했던 일이 지금도 역력히 생각난다. 우리 내외에게는 아홉 살 난 아주 애교 있고 귀염성 있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편도선염에서 디프테리아로 이어지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지만, 딸의 상태는 곧 회복되는 것 같아서 우리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자벳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떠나가고 말았다. 보건소 직원들이 들어와서 어린 아이의 시체를 곧 묻으라고 명령했다. 물론 장례하는 곳에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어린 것의 오빠와 동생들까지도 함께 가지 못하고 길 건너편에서 저들의 누이의 시체가 누워 있는 곳을 건너다 볼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성서학원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나는 “오, 엘리자벳”하고 목을 놓아 울었다. 바로 이때이다. 내 마음속에 깃들여 있던 그 샘물이 내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하던 큰 세력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이때에 나의 일생에 처음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을 느끼었다. 아, 성령의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의 외부적 조건으로는 전혀 얻을 수 없고 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고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기쁨의 샘이 있을 때만 이 샘이 솟고 또 솟아 일년 365일을 두고 어떠한 경우에 처해 있든지 끊임없이 영생토록 솟아나는 기쁨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2)영원한 만족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샘을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러해 전 뉴햄프셔 주에서 구입한 토지에서, 집터를 닦기 전에 발견한 우물은 맑기가 수정 같았다. 몹시 날이 가물 때에도 우물에는 물이 풍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마셨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결점은 내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될 때, 그 우물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서전쟁(美西戰爭)을 하는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아무데도 마실만한 샘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보기에도 좋았고 물맛도 좋았다. 그러나 그 우물은 마시기만 하면 배탈이 났다. 우리 집 우물이 그리웠지만 수백리 밖에 떨어져 있는 그 우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우물에 비할 데 없는 한 샘이 있었으니, 내 육신은 비록 목말랐으나 나의 영혼은 이 샘으로 인하여 만족하였었다. 이는 곧 나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샘이 계속 솟아나서 영생과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의 심령에 만족과 기쁨의 샘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는 세상의 기쁨의 근원에는 전혀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생각하기를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춤을 추지 말라, 노름을 하지 말라, 극장에 가지 말라, 그 밖의 이러저러한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본다. 훨씬 좋은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고 또한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충만히 계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정같이 말고 깨끗한 샘물이 어디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흙탕물을 마시려고 찾아갈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어째서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세속적인 향락을 취하러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껏 그들은 성령을 그들에게 내재시키는 생명과 희락과 만족의 샘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샘이 막혀버린 탓일 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이 성령의 샘을 못 가졌거나 막혀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성령의 샘이 왜 막힐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출생한 곳에서 약 20마일 떨어진 뉴욕주 제네바로 갔었다. 우리는 주택을 샀는데, 그 집의 원주인은 건축비를 많이 들여서 여러 날 공사를 했는데,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음료수였다. 좋은 샘물이 있기는 하였지만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물이 많이 나오는지 집터가 온통 침수가 되리라고 생각될 만큼 물이 많이 솟았다. 그래서 물이 솟는 큰 구멍을 찾아내어 양탄자 조각으로 막고 돌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물이 도무지 나오지 않으므로 우물은 완전히 헛것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원주인은 우물에 들인 노력을 생각하여 다시 우물의 구멍을 막아 놓은 양탄자를 빼버렸는데, 이때는 물이 과하게 나오지 않는 훌륭한 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만일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기쁨의 원천인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샘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샘물의 구멍이 죄의 헌 누더기, 즉 세속적인 취미의 헌 누더기로 막혀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헌 누더기를 빼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호주 멜버른의 집회 때에, 영국교회의 한 목사는 기쁨의 샘구멍이 꼭 막혀 버렸었다. 그는 나의 설교를 듣고 그의 심령 속에서는 큰 불안이 생기고 옛날에 맛보던 그 기쁨이 몹시 그리워졌다. 그는 켄트목사의 도움을 받아 낡은 양탄자 헝겊을 빼내고 전에 느꼈던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 내려오다가 그것을 잃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못나오게 막고 있는 것을 찾아내서 다시 나오도록 하자.
영국 브리스톨의 집회에서는 이 기쁨의 샘구멍을 담배가 막고 있었던 사람이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각기 자기의 심령에 있는 샘물을 막고 있는 마개를 찾아내자. 아마도 샘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의 샘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고, 또한 그 마개를 가르쳐 주시면 그것을 빼어버리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는 성령의 기쁨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또한 요한복음 4장 10절을 통하여 주 예수께 구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말로만이 아닌 진정으로 구해야 한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령의 샘을 갖겠다는 갈망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 순복시켜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까닭이다.(행 5:32)
1~4장 요약
Ⅰ. 성령의 인격
성령께서는 한 인격자이시다. 오늘날 성령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생각이 많은 이유는 성령을 인격자로 인식하지 않고 그 역사(役事)하심만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기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고 극히 실제적이다. 성령이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을 원만히 받지 못한 사람이며 기독교적인 신관(神觀)을 확실히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1)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예배에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성령이 비인격적인 감화력 혹은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령께 드려야 할 예배를 약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과연 우리는 성령께 예배드리는가? 물론 찬송의 가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이론적인 말이나 노래를 한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 노래의 뜻과 힘을 확실히 깨닫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2)성령을 인격자로 아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성령을 한 감화력이나 능력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을 붙잡아서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결국 자만심과 자고심(自高心)과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성령을 받았다고 광신(狂信)하는 나머지 자신을 특별히 뛰어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가지신 인격자라로 믿는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나를 이용하시게 할 수 있을까”라고 소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희생하고 겸손해야 되겠다는 생각 밖에 다른 것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겸손한 태도와 생활은 성서의 위대한 진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3)성령에 대한 인격의 교리는 경험상으로 보아서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신자들이 성령이 한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의 신앙경험과 봉사정신이 전적(全的)으로 변하였음을 간증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제목의 설교를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성령의 인격에 관한 설교이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말하였고, 이에 관하여 서신으로 묻기도 하며 간증도 했다.
2. 성령이 인격자이심을 증명하는 네 가지 사실
1)성령의 인격의 특성이 모두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인격의 특성은 지(知), 정(情), 의(意)이다. 그러나 성령이 인격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과 같이 수족과 이목구비를 가지신 것은 아니다. 모양은 인격의 표시가 아니라 사람의 형체의 표시이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지상 생활이 끝나게 된다면 우리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할 것이다.(고후 5:8) 그러므로 인격의 표시는 신체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있으며, 이해와 느낌과 의지를 가진 실재(實在)가 인격자이다.
①성령께는 지식이 있다(고전 2:11)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는 한 빛으로서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진리를 비추어 주고 더욱 힘있게 인식하게 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진리를 아시고 그 아시는 바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이다.
②성령은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쓰시는 신령한 인격자이시다(고전 12:11)
성령은 단지 우리가 붙잡아서 우리의 뜻대로 이용하는 신령한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으셔서 당신의 뜻대로 쓰시는 신령하신 인격자이시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성령이란 신령한 능력을 얻어서 그들의 뜻대로 이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무식한 우리는 필경 죄악을 짓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붙잡아서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스러우신 뜻대로 이용하실 수 있는 신령한 인격자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③성령의 생각(롬 8:27, 8:7)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마”는 지식, 감정, 의지의 세 가지 관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롬 8:7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또한 육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육신의 도덕적 및 지적(知的) 생활의 일부가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④성령의 사랑(롬 15:30)
성령은 단순한 맹목적인 감화력이나 능력이 아니고 친히 인자(仁慈)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령하신 인격자이다.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성령을 바라보며 “성령이여 저를 사랑하신 당신의 크신 사랑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여 본적이 있는가?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지만 성령의 사랑으로 인하여서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를 찾아내시려고 날마다 나의 뒤를 따르며, 또 내가 그의 말씀을 듣지 아니 하였을 때와 그를 일부러 거역하며 그를 모욕하였을 때에도 나를 잊지 않고 따라다니신다. 또한 정녕코 괴로운 처지까지라도 따라오셔서 나의 미련함을 깨우치고 나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하셔서 바로 내가 구하던 구세주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또한 주님으로 모셔 들일 수 있게 하도록 성공할 때까지 도와주신다.
⑤성령의 지혜로움과 선하심(느 9:20)
지혜로움과 선함이 다 성령의 것이다. 이 구절처럼 인격자이신 성령의 교리를 구약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인격의 교리는 구약에도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교리 또한 구약에서도 수백 번이라도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거의 다 이 교리가 들어있는 것이다.
⑥성령도 근심하신다(엡 4:30)
성령은 죄를 극히 싫어하시는 거룩한 인격자이시다. 우리가 가장 적은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도 거부하시고 물러가시는 인격자이시다. 그러므로 한낱 떠도는 공상일지라도 성령께서 몰래 우리의 마음속에 잠깐 동안이나마 깃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조심하여 우리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을 즐거우시게 하려고 하는 능력 있는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원에서 오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우리의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될 어떤 생각이 나곤 한다. 이때에 생각을 마음속에 그대로 두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은 그 생각을 아시나니 그로 인하여 슬퍼하시리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먼저 가졌던 무익한 잡념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극장이나 댄스홀에 간다면 성령께서도 가실 것이다. 이런 장소가 성령께 알맞은 분위기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성령께서도 반드시 따라가신다. 식구끼리 화투놀이를 한다 할지라도 성령께 알맞은 분위기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안다면 단연 이런 노름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더라도 나만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진실로 모든 문제를 성령의 뜻대로 해결하기 원해야 한다.
2) 인격자만이 행할 수 있는 여러 행동을 성령께서 가지신다
①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달하시는 분이시다(고전 2:10)
성령은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는 빛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통달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인격자이시다. 성령이 인격자가 아니시라면 도저히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②성령은 친히 기도하시는 인격자이시다(롬 8:26)
신자들은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신령하신 두 인격자를 모시고 있다. 한 분은 아버지 앞에서의 성자이시고, 또 한 분은 낮은 땅 위에서의 성령이시다.(요일 2:1, 히 7:25) 1901년 세계일주 여행 시 4만여 명이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아래서 설교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이며 또한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 신기하랴! 물론 지금도 그들이 나를 위하여 모두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남녀 4만명의 기도와 성자 그리스도와 나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해 주시는 보혜사 성령과의 두 신령하신 인격자를 모시는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두 신령하신 인격자를 모시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③성령은 가르치시는 분이시다(요 14:26, 16:12-13)
성령은 살아계신 인격자이신 교사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성서를 연구할 때마다 그 성서의 저자이신 성령을 모시고 우리에게 성서를 해석해 주시며 또 그 참뜻과 중심 사상을 가르쳐 주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가장 훌륭하다는 인간의 교사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으신 교사를 날마다 모실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인격자의 속성만 될 수 있는 속성이 성령의 속성이다(요 14:16-17)
성령은 우리 주 예수의 대신으로 오시는 다른 보혜사로서 표현되어 있다. 만일 주 예수를 대신하여 오시는 다른 분이 단순히 비인격적인 감화력이나 능력이었다면 주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하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신령한 인격자이신 당신은 떠나가시되 대신 당신과 꼭 같이 신령한 인격자이신 다른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가장 귀한 약속 중의 하나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인격자로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며 온갖 위급한 경우에 있어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라는 말은 영어의 comforter 보다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가 보다 고상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위급한 일을 당할 때에 함께 서둘러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와준다는 뜻이다. 또한 요한1서 2:1의 대언자는 advocate로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부름받은”이라는 뜻인데 이 또한 그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떠나실 때까지는 친히 신자들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시어 언제나 도와주시려고 가까이 계신 친구였다. 이때에 제자들은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의례 주님께로 향하였던 것이다.(예 - 주기도문,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떠나가시게 되어 제자들이 낙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 대신 나와 꼭 같이 신령하시고 사랑이 많은 분이 오셔서 너희가 위급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능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일생 동안 아무런 공포의 순간도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시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떠한 위급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어찌 두려워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은 모든 두려움을 없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뉴욕주에 있는 어느 호수가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사경회가 끝난 후 약 4마일 떨어진 사촌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시간에는 폭풍이 불고 있었다. 사촌의 집으로 가는 호수 위의 비탈길은 어둠에 싸여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도랑이 여기저기 패여서 비탈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라 여관으로 되돌아 갈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너는 부흥사경회에서 성령은 인격자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신다고 설교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네 곁에는 지금 성령께서 동행하고 계시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 나는 어둠 속의 4마일을 즐거운 산보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걸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런던 로얄 알버트 교회의 젊은 부인은 어두운 방에 혼자 못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 후 그녀가 편지하기를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캄캄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캄캄한지요. 그러나 그 방은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빛나고 찬란했었습니다”
또 나는 불면증으로 2년 동안이나 암담하고 지긋지긋한 세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에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다가와 불면증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깊이 들게 되었다. 몇 해 동안은 이렇게 잘 지냈다. 그런데 시카고의 성경학교에서 불면증이 재발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전에는 바로 내가 아래층 강의실에서 성령의 인격에 관하여 말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위를 우러러 보며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이시여, 당신은 지금 여기 계시나이다. 무엇이든지 나에게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성령께서는 입을 열어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묘하고도 귀중한 말씀을 들려주시어 나의 영혼을 안정과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 주셨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인격자이신 친구라는 사상은 또한 우리의 고적(孤寂)함을 소멸하여 주신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친구이시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면 일생 동안 아무런 외로운 순간도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한번은 바다에 떠있는 기선(汽船)의 갑판 위에서 밤에 거닐고 있었다. 갑판 위를 혼자 거닐고 있노라니 1만 7천마일 밖에 떨어져 있는 네 아이들의 생각이 나서 문득 마음이 쓸쓸해졌다. 이때에 나는 나의 곁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폭풍이 부는 이 밤에도 나와 함께 갑판 위를 거닐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고적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은 인격을 가진 친구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귀한 진리는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도 이를 없이하여 준다. 오늘날 세상에는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셔서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것만 알면 잠깐이나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인격자이시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가장 큰 능력과 도움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나타난 은사인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 유달리 부끄러움을 타는 성질이 있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면 머리털 끝까지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교회의 기도회에서 말 한마디 못하였다. 나의 초기의 성직(聖職) 생활은 고통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즐거운 날이 돌아왔다. 내가 설교하려고 일어설 때, 나는 보지만 사람들은 볼 수 없다는 다른 한 분이 나의 곁에 계시다는 것과 또 설교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 분에게 있는 것이며, 나로서 해야 될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나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청중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 곁에 서 계신 분으로 하여금 설교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옳은 것만 말씀하실 것이다. 성령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인격자이시다. 아마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다 성령이 인격자이심은 알고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성령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며 그를 인격자로 모시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성령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맡아 보시게 하려고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나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2. 죄인을 회개시키는 성령(요 16:7-11)
1)세상의 죄를 깨우치시는 성령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에 대한 심각한 의식을 일깨워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죄에 관련된 그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과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부흥운동의 큰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거나 또는 나오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 자신이 하셔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에 대하여 눈이 어두우므로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세상의 죄를 깨닫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이론과 설복시킬 수 있는 힘이 강하고 또한 감상적인 이야기라든지 슬픈 노래를 듣고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만 가지고는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설교나 개인 전도에 있어서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잘못은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함에 있어서 우리가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려고 서두르는 것이다.
중앙철도국에서 근무하는 기사(技士)는 한 여전도사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으나 아무 감동도 받지 못했다. 여전도사의 부탁을 받은 나는 그와 이야기하면서 성령께서 친히 당신의 말씀으로 그를 감동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자 십분도 채 못 되어 그 사람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였다. 이것은 신비로울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즉 그 여전도사는 그만 실수하였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실 일을 자기가 하여 자기의 힘으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죄를 깨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시카고시의 무디교회의 목사로 있을 때에, 우리는 교회 운영에 대하여 토의하지 말고 우리를 통회자복하게 하시는 성령을 보내달라고 부르짖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카고에 살며 노름을 하던, 생전에 처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고 하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더니 자기 죄를 모두 사함을 받았다는 기쁨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이와 같이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으려면 우리로서는 전혀 사람을 회개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실 줄 믿고, 그 일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하여 주실 줄 바라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엇보다도 귀중한 일은 성령을 믿는 일이다. 죄를 일깨워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그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행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이다. 음주, 도둑질, 간음, 살인 그 밖의 어떤 부도덕한 짓을 행하는 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성령께서 일깨워주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신 그분을 믿지 않는 그 무서운 죄이다. 이 불신앙은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하고 결정적인 죄이며 견디지 못할 저주받을 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2)성령은 세상으로 하여금 의(義)를 깨닫게 하신다
이 의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여 두신 의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와 그것을 어떻게 씻는 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신 의를 아는 것이다. 이것들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사람들이 죄를 뼈아프게 깨닫게 되면, 심각한 통회(痛悔)가 있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빛이 마음속에 비치어서 사죄하여 주심을 분명히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의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피츠버그의 집회에서 어떤 교인이 심령 부흥을 비방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밭고랑에 거꾸러져 죄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던, 그래서 밭고랑에서 일어나기 전에 구원을 받았던 일을 말했다. 이처럼 사람이 성령에 의하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죄를 통회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여주신다. 그러면 그는 곧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준비해 두신 그 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스코틀란드의 목사가 전국 여행 중에 여관에서 생긴 일이다. 여관 주인은 예배의 인도를 부탁했고, 목사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모일 것을 부탁했다. 한 하녀가 빠졌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목사는 그 불쌍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여종에게 큰 관심을 두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주여, 내 자신을 나에게 보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그 목사는 한 젊은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자는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과 또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나의 모든 죄 짐을 벗어버리고 저는 행복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렇다. 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신 의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3)성령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깨우쳐 주신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은 심판이니 이는 곧 이 세상의 악마의 심판에 의하여 증명된 것이다.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심판에 대한 각성이 요청되는 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개가 장래에 있을 심판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다. 정통파다운 교역자들도 지옥을 잊어버리고 설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교훈할 것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것만을 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왜 우리 목사들이 지옥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을까? 확실히 이에 대하여 설교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설교에 복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에 심판을 믿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구주(救主)를 배척하는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계시로 깨달았다. 그 날부터 나는 조금도 성서에서 가르친 장래의 형벌에 대하여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성령은 신자들을 통해서만 세상을 깨우치신다(요 16:7-8)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그는 당신의 역사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행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은 신자에게 오셔서 그가 임하시는 신자를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회개의 사실은 모두 사람의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라도 사람의 회개를 통하지 않고 된 것이 없다.(고넬료의 회개, 사울의 회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은 다 그 입술을 성령께 바쳐서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누구에게나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달아 알게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여러분의 생활에서 철저히 몰아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기에 조금도 막힘이 없는 통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되 날카롭게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 브라이톤에서 우리 동역자 한 사람이 음식점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다가 식사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전도하려고 기다리다가 주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은 그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시중들고 나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자살했습니다”
우리는 엄숙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하여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 계시면 곧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만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3.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1)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명하시는 성령(요 15:26-27)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또한 성령은 모든 일을 듣고 우리에게 선포하여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개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직접적인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만 우리는 진실하시고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고전 12:3)
성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주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다.(행 5:32, 요 7:7) 이 말씀은 비록 복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요한복음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뜻을 순복시키고 또 복음을 읽을 때까지 자기가 읽는 바를 그의 심령에 해석하여 주실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복음을 한 번이라도 통독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교역자들에게는 흔히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기 위하여 물어보러 오는 사람이 있게 된다. 이때 너무나 상대자가 깨닫지 못할 때는 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둔할까 하고 생각하게 될 때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이다. 그 사람도 다른 일에 대해서는 여간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번이고 싫다 말고 되풀이하여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그 질문하러 온 사람의 심령에 당신의 증거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밝히 나타내려면 우리 자신의 말재간이나 권면의 힘이라든지 또는 자기의 성서 지식이나 그 지식을 이용하는 방법에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혀 무능한 것임을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어 성령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게 하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실 수 있을만한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게 하도록 힘쓸 것이다.
2)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요 3:3-5)
중생의 정의 1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는 것이다.(엡 2:1)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데 성서를 도구로 쓰심은 물론이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성서에 기록된 말씀은 성령께서 사람을 중생하게 하시는 데 이용하시는 도구이며, 중생이 일어나게 하는 데 말씀을 이용하시는 분은 성령뿐이시다.(벧전 1:23, 약 1:18)
그러므로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는 뜻은 책에 기록된 말씀, 곧 단순한 의문은 죽이는 것으로서 사람을 정죄하고 죽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심령, 심비에 하나님의 영이 기록하신 말씀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곧 살아 계신 성령이 오늘날 개인의 심령을 차지하고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에 기록하여 주셔야만 사람이 살아있고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다.
설교나 개인전도나 또는 가르침으로써 아무리 기록된 말씀이나 성서를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나 개인전도나 가르침으로써 사람을 거듭나게 하기 원한다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그에게 개인전도나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성령께서 우리의 상대자의 심령에 가져가게 하시고 또한 우리 자신은 성령께서 당신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의 정의 2
중생은 새로운 성품 곧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이다.(벧후 1:3-4) 왜냐하면 가문이 훌륭하고 부모가 경건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진리에 어두운 마음과(고전 1:14)부패한 애정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땅히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될 것을 미워한다. 또한 우리는 모두 옳지 못한 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롬 8:7)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든 비열한 것이든 간에 이것들은 죄의 본질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기초를 둔 의지는 어떤 것이거나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는 의지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의지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이지적으로, 감성적으로 또는 의지적으로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된다. 먼저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새로운 성품을 받는다. 어느 날 집회에 들어왔던 불신자인 그는 고급 관리였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 사람은 즉석에서 거듭났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그에게 미련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낮과 같이 밝아져서, 일주일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이 진리를 깨우쳐 주려고 힘쓰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를 빛으로 인도하였으며, 그 후 일년이 못되어 복음을 전도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정적(靜的) 성품도 받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좋아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좋아하게 된다. 성서를 날마다 읽기는 하였지만 나는 성서를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거듭난 후부터는 내 마음은 성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무도회, 노름장, 경마장 같은 데 가는 것은 싫어졌고,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와 주일에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후 5:17)
그리고 새로운 뜻도 받게 된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의 의지는 이미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자신의 욕망은 무가치한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이 중요한 일이 된다. 이 성품을 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새로운 성품을 새로 난 사람에게 주시는 데 이용하시는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려고 하면 성서만 읽는 것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서를 읽는 동시에 우리의 모든 뜻을 성령께 바치겠다는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한 단지 기록된 그대로의 복음만은 저주와 죽음을 알려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말씀만 고집하는 이른바 전통적인 교역자나 교사의 전도는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지혜의 권하는 대로 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2:4)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데 필요한 조건이 우리에게 구비(具備)만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역사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심령은 밭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종자이며, 교역자와 교사와 개인 전도자들은 씨 뿌리는 사람이다. 일을 행하시도록 그에게 맡긴다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뿌린 씨에 생명을 주실 것이며, 그들의 심령은 신앙으로 덮이어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게 된다. 나는 사람이 갑자기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중생도 믿는 바이다. 회개란 외형적인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생은 사람의 심령과 정신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속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로서 생명을 받고 새로운 성품을 받는 것이 중생이다.
나는 사람의 돌연한 중생, 곧 속사람이 갑자기 온전히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 성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나는 수없이 이러한 사실들을 목격하였다. 나와 함께 몇 해 동안 동역했던 무디 교회의 부목사인 윌리엄 에스 제이콥은 42세가 되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평판이 있는 심한 죄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어느 날 밤, 복음 전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회개하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일찍이 가져 본 일이 없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될 만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우리가 어찌 돌연적인 중생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기록된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성령께서 중생의 역사를 하시는 권능을 믿으며 또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 속에 뿌려진 말씀에 생명을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셨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발로 서서 설교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한, 지구 위에 사는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단념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성령의 권능 안에서 설교하며 가르치려고 결심하고 있는 바이다.
이 신생(新生)의 교리는 영광스러운 교리이다. 이것은 거짓된 소망을 쓸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네가 아무리 철저하게 생활을 혁신하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한 “온후한 인격과 친절한 마음과 관대한 동정심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리는 종교의 외형적인 것으로 자신을 가지는 사람에게도 “그대는 모든 외형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거듭나야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거듭났는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거듭날 수 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준비만 하고 있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으며, 남은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자리의 준비뿐이다.
4. 완전하고 영원한 만족
1)완전한 만족(요 4:14)
우리는 주님께서 어떠한 경우에 이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제6시”라는 말을 대낮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연구의 결과 요한이 복음을 기록하던 에베소에서는 지금의 오후 여섯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주님은 온종일 한 도보의 여행길에 너무도 피곤하셔서 샘물가에 앉으셨다. 그런데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을 보시고는 주님께서는 영혼을 구하기 원하시는 갈증을 느끼셨다.
여기서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또 다시 목마르리라”고 하셨다. 진실로 옳은 말씀이다. 모든 세속적인 만족과 기쁨의 샘은 그것을 아무리 깊이 들여 마셨다 하더라도 다시 목마르게 되는 것이다. 명예, 권세, 향락, 과학, 예술 등의 샘물을 아무리 마신다 해도 다시 목마르게 된다. 즉 하나도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계속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물은 성령이며 주님을 믿는 자와 선물을 간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을 자기의 심령 속에 계실 분으로 진정 모셔 들이는 사람은 완전하며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된다.
기쁨의 근원을 우리의 자신 속에 둔다는 것, 곧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지체나 또는 우리의 소유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 기쁨의 원천을 가진다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는 환경이나 사정이나 또는 재물이 있고 없는 데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나 기쁠 것이다. 자기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이 들릴 때에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하더라도 꼭 같이 기뻐할 것이다.
수년 전에 내 아내와 내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당했던 일이 지금도 역력히 생각난다. 우리 내외에게는 아홉 살 난 아주 애교 있고 귀염성 있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편도선염에서 디프테리아로 이어지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지만, 딸의 상태는 곧 회복되는 것 같아서 우리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자벳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떠나가고 말았다. 보건소 직원들이 들어와서 어린 아이의 시체를 곧 묻으라고 명령했다. 물론 장례하는 곳에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어린 것의 오빠와 동생들까지도 함께 가지 못하고 길 건너편에서 저들의 누이의 시체가 누워 있는 곳을 건너다 볼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성서학원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나는 “오, 엘리자벳”하고 목을 놓아 울었다. 바로 이때이다. 내 마음속에 깃들여 있던 그 샘물이 내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하던 큰 세력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이때에 나의 일생에 처음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을 느끼었다. 아, 성령의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의 외부적 조건으로는 전혀 얻을 수 없고 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고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기쁨의 샘이 있을 때만 이 샘이 솟고 또 솟아 일년 365일을 두고 어떠한 경우에 처해 있든지 끊임없이 영생토록 솟아나는 기쁨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2)영원한 만족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샘을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러해 전 뉴햄프셔 주에서 구입한 토지에서, 집터를 닦기 전에 발견한 우물은 맑기가 수정 같았다. 몹시 날이 가물 때에도 우물에는 물이 풍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마셨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결점은 내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될 때, 그 우물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서전쟁(美西戰爭)을 하는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아무데도 마실만한 샘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보기에도 좋았고 물맛도 좋았다. 그러나 그 우물은 마시기만 하면 배탈이 났다. 우리 집 우물이 그리웠지만 수백리 밖에 떨어져 있는 그 우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우물에 비할 데 없는 한 샘이 있었으니, 내 육신은 비록 목말랐으나 나의 영혼은 이 샘으로 인하여 만족하였었다. 이는 곧 나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샘이 계속 솟아나서 영생과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의 심령에 만족과 기쁨의 샘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는 세상의 기쁨의 근원에는 전혀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생각하기를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춤을 추지 말라, 노름을 하지 말라, 극장에 가지 말라, 그 밖의 이러저러한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본다. 훨씬 좋은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고 또한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충만히 계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정같이 말고 깨끗한 샘물이 어디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흙탕물을 마시려고 찾아갈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어째서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세속적인 향락을 취하러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껏 그들은 성령을 그들에게 내재시키는 생명과 희락과 만족의 샘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샘이 막혀버린 탓일 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이 성령의 샘을 못 가졌거나 막혀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성령의 샘이 왜 막힐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출생한 곳에서 약 20마일 떨어진 뉴욕주 제네바로 갔었다. 우리는 주택을 샀는데, 그 집의 원주인은 건축비를 많이 들여서 여러 날 공사를 했는데,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음료수였다. 좋은 샘물이 있기는 하였지만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물이 많이 나오는지 집터가 온통 침수가 되리라고 생각될 만큼 물이 많이 솟았다. 그래서 물이 솟는 큰 구멍을 찾아내어 양탄자 조각으로 막고 돌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물이 도무지 나오지 않으므로 우물은 완전히 헛것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원주인은 우물에 들인 노력을 생각하여 다시 우물의 구멍을 막아 놓은 양탄자를 빼버렸는데, 이때는 물이 과하게 나오지 않는 훌륭한 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만일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기쁨의 원천인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샘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샘물의 구멍이 죄의 헌 누더기, 즉 세속적인 취미의 헌 누더기로 막혀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헌 누더기를 빼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호주 멜버른의 집회 때에, 영국교회의 한 목사는 기쁨의 샘구멍이 꼭 막혀 버렸었다. 그는 나의 설교를 듣고 그의 심령 속에서는 큰 불안이 생기고 옛날에 맛보던 그 기쁨이 몹시 그리워졌다. 그는 켄트목사의 도움을 받아 낡은 양탄자 헝겊을 빼내고 전에 느꼈던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 내려오다가 그것을 잃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못나오게 막고 있는 것을 찾아내서 다시 나오도록 하자.
영국 브리스톨의 집회에서는 이 기쁨의 샘구멍을 담배가 막고 있었던 사람이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각기 자기의 심령에 있는 샘물을 막고 있는 마개를 찾아내자. 아마도 샘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의 샘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고, 또한 그 마개를 가르쳐 주시면 그것을 빼어버리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는 성령의 기쁨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또한 요한복음 4장 10절을 통하여 주 예수께 구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말로만이 아닌 진정으로 구해야 한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령의 샘을 갖겠다는 갈망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 순복시켜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까닭이다.(행 5:32)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에 관한 試論-역사신학적 관점에서-이 상 훈/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A. 기독교 역사관 형성을 위하여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역사속에는 어떠한 원리가 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매일의 삶에서 얼마나 소위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이러한 일이 왜 필요한 것인가? 일반 세계사와 기독교의 구속사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우리가 ‘기독교 역사관’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할 때 이상과 같은 많은 질문 앞에 서게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는 역사의식이 필요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굳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역사와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더구나 미래를 지향하는 인간의 과제는 당연히 과거와 현재의 삶을 돌이켜 봄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고자 한다.또한 기독교인으로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떠한 이론적인 가설이나 추상적인 사상에 근거하여 세워진 종교가 아니라 분명한 예수그리스도의 사건과 그의 제자들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이 이 단원의 목적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수평적인 차원의 이해에 그치기 쉬운 우리의 시야를 수직적인 면에까지 확장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다.1.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 역사라는 말을 정의할 때 우선 크게 2가지 어의를 갖는 단어를 떠 올릴 수 있다. 희랍어의 ‘히스토리아(Historia)’와 독일어의 ‘게쉬히테 (Geschichte)’가 그것이다. 전자의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희랍의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수(Herodotus)와 투키디데스(Thuchydides)인데 그들에 의하면 이는 ‘발생한 사건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 탐구한 결과, 탐구한 내용’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은 과거 일어난 사건의 인과관계를 현재라는 싯점에서 조명하여 보는 조직적인 역사의 연구로서 이러한 시도는 그들을 최초의 역사가라 부르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후자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로 ‘일어난 일’ 또는 ‘발생한 사건’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같은 일이나 사건에 관한 ‘지식과 설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들을 정리해 보면 역사란 객관적인 측면 즉 인간의 과거와 관련되어 발생한 사건과 주관적인 측면 즉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인과관계의 추론과 이에 대한 재 구성, 의미있는 서술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휘튼대학의 Earle E. Cairns 교수의 말을 빌리면 “역사는 고고학자료, 문서자료, 현존자료 등으로부터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집되고 조직화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해석이 가해진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E.E.Cairns, 서양기독교사, 김기달 역, 보이스사 1986, p. 18) 한편 E.H. Carr는 역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글에서 “역사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고,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만일 인간사회에 변화가 없다면 역사는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말이 갖고 있는 두가지 의미, 곧 사건으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모두 인간사회의 끊임없는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고, 다만 역사는 현재의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변화를 대상으로 하고 과거의 인간의 행위, 그것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친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았다. 즉 과거의 사실이 역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E.H. Carr, 역사란 무엇인가, 황문수 역(서울:범우사, 1977), 해설, p.214) 사회는 역사가에 대해 이중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Carr는 말한다. 첫째로 역사가는 과거의 사회를 연구대상으로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가 자신도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회에 속해 있어서 그 사회의 관심과 가치관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Ibid. p.215)그러면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라는 독특한 역사의 사건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고 전 역사를 해석하는 기독교적 역사관에서도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가? 과연 기독교의 역사관은 과거 사건에 대하여 분명한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가? 이미 언급한 대로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연구 방법의 원칙을 실증사학적 입장에서 제시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의 이상은 매우 의미심장한 구호가 아닐 수 없다. 즉 ‘실제로 그것은 과연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ist)’를 규명하는 실증의 방법을 통해서만이 역사가 재구성될 수 있다는 역사 고증의 방법은 실제로 그 이후 모든 역사가들의 기본적인 방법론이 될 만큼 설득력이 있는 구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듯 과거 사실의 객관적 실증을 주창한 실증주의 사학은 앞서 언급한 역사의 또 다른 측면 즉 ‘역사의 의미 추구’라는 점에서 주관적인 측면을 소홀히 취급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 인식에 있어서 필요한 사료를 참조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모두 과학적으로 증명할 만한 공정한 법칙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George M. Marsden 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역사가의 기독교적 가치 체계는 그가 기술하기 위하여 선택한 사실(사료)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말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적인 신앙전승에 충실하기 위하여 역사 그 자체까지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편향적이거나 왜곡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선입관을 가지는 것이 불가피할지라도 역사가들은 부단히 초연한 자세로 모든 이용할 수 있는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고 그것이 자기의 선입관과 편견에 맞지 않더라도 발생하는 사건을 공정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런 경향을 극복할 수 있다. ”(George M. Marsden,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가? 홍치모 기독교와 역사이해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81), p. 51) 하지만 역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역시 역사인식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마이네케(F. Meinek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동일인이 서술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의 청년시절, 노년시절의 사상적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그 자신의 역사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그 해석 태도 역시 달라질 수 있다.”(이석우편저, 기독교사관과 역사의식(서울:성광문화사, 1989), p. 16에서 인용) 또한 종교사가로 알려진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적 탐구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들에 직면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탐문하고 타인의 삶의 관심을 이해하는 데 있을 것이다.”콜링우드는 실증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역사가의 일이 외부의 사건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은 될 수 있으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는 사건이 행위라는 것과 자신의 주된 사명이 그 행위의 집행자의 생각을 알기 위해 행위 속에서 사고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R.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Clarendon, 1946, p. 213) 그가 주장하는 바는 역사속에 일어난 단지 객관적인 사실의 조명에만 역사가의 임무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역사 내적 행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콜링우드에게 있어서 이러한 역사의 의미탐구는 고대 사회의 역사관이 단순히 순환적(Cyclical)역사관에 의한 역사의 특별한 의미부여를 상실한 역사관임에 비해, A.D. 4-5 세기, 특히 어거스틴에게서 보는 선적(Lineal) 역사관의 혁명을 가장 중요한 역사관의 하나로 꼽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이상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의 의미들 속에서 기독교의 역사관이 갖는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기독교는 역사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종교이다. M.Bloch의 말처럼 “기독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종교이다. 기독교는 그 근본적 교의를 역사적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종교와도 특이한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 사도신경에 “나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를 보라. 그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의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기독교의 진리성은 역사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로버츠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2. 역사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우리의 논의는 역사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물음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사가 인간들의 과거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일련의 사건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주체를 묻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견되었던 사실이다. 역사의 기본 단위를 이루고 이를 구성해 나가는 주체로서의 인간 개개인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종종 예로 들고 있는 로마역사의 한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씨이져(Caesar)의 루비콘 강의 도하 사건(Cross the Rubicon)이나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사건 등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한 개인의 의지적 결단으로 역사의 과정에 커다란 변화를 이루었다는 사실 등은 역사를 이루고 있는 기본 단위로서의 인간 개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점들이 아닐 수 없다.일찌기 어거스틴은 역사를 정의하면서 “역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목도한 역사는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도 아니었고, 아벨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함께 거쳐하는 이상향의 현현은 더욱 아니었다. 첫사람 아담의 범죄는 인간들에게 또 다른 범죄의 의지적 결단을 유도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집합으로서의 역사는 그야말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투쟁의 역사요, 파괴와 건설이 함께 숨쉬는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역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잘못된 사용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약속된 파라다이스 속에서 흥망성쇄의 고락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거스틴 역시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주체적 요소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라고 보았다 할 수 있다.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인간 개개인의 의지를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인정하면서 또한 그것에만 만족할 수 없는 다른 변수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역사를 이루고 있는 어떠한 법칙이나 규칙 등의 발견과 이에 따른 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접근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금세기에 들어서 발생했던 양차대전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한 큰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일련의 제 원인들이 보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반 원인들은 상당히 명약관화한 것이어서 어떤 역사가는 이미 수년전에 20세기에 들어서 큰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예견을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세기에 와서는 강대국들의 냉전구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함께 곧 무너질 것이라는 학자들의 예견을 우리시대에서 목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역사의 주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의지적인 결단을 넘어선 무엇인가 보다 큰 단위를 이루는 법칙으로서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보다 큰 단위로서의 역사 법칙이 토인비가 이야기하는 ‘도전과 응전’과 같은 법칙이든지, 혹 ‘탄생, 성장, 성숙, 쇠퇴와 죽음’이라는 하나의 유기적인 삶과 같은 것으로 역사를 이해한 스팽글러(Oswald Spengler)의 순환의 법칙이든지, 혹 역사를 ‘세계정신의 자기구현’이라고 정의한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이든지 이들은 모두 역사속에서 역사를 이루고 있는 주체로서의 단위를 한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일련의 제반 법칙들 속에서 찾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자유의지의 결정들은 이러한 일련의 제반 법칙들 속에서,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들로 설명하고자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과학, 혹 법칙으로서의 역사는 언제나 역사속에서 소위 ‘우연’에 관한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어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역사에서 법칙을 확고히 믿는 학자가) 왜 수상이 그 거리를 걷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붕에 붙어있던 타일이 늘어졌다가 어떤 순간에 떨어진데 대해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연결되어서 수상이 마침 그곳에 이르렀을 때 그 타일이 떨어져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었다.”1 허버트 버터필드, 크리스천과 역사해석, 김상신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 67.이러한 좀 극단적이라고 느껴지는 예는 역사에서의 소위 ‘법칙’이 그렇게 단순한 공식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렇다면 역사는 이처럼 어떤 정돈된 법칙이 없는 단지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산물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를 지배하는 주체는 ‘우연’인가?성서의 커다란 주제는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에 드러내 보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서의 증언은 역사가 단순히 인간들의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만 흘러가도록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또한 역사 속에 섭리의 손길을 배제한 폐쇄된 의미의 제 법칙들에 의한 자존적 존재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역사가 우연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상적인 세속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는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성서의 주요 테마인 것이다. 성서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역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 설계는 인간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인간의 자유에 구속되지 않는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하나님안에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이들의 고백이기도 하였다. 이들에게는 역사는 분명한 섭리속의 방향과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 속에서 역사하는 주체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함께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역사이해에 결정적인 차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스덴은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역사해석에 있어서의 제일의 차이점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 속에서 활동하신다’ 라는 고백의 유무의 차이이다.” George M. Marsden,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가? 홍치모 기독교와 역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81), p. 53.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철학사가 에밀 브레이에(Emil Brehier)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제하는 이신론적 역사관과 섭리를 인정하는 섭리사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 ...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인간관이 소개되었음을 분명히 보게 된다. 우주의 놀라운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한 조물주 하나님(God the architect)은 자연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드라마의 하나님, 즉 아담에게 “죄지을 능력과 명령을 거역할 힘”을 주신 하나님의 설 자리는 이제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연 안에 계신 분이지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자연주의자와 생물학자가 분석한 불가사의 속에 계시지 더 이상 인간의 양심 속에 계시면서 그의 임재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죄, 수치심, 은혜 등을 일으키시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지도록 버려두셨다.” Emil Brehier, The History of Philosophy, Wade Baskin 역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67), p. 15.역사의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의 영역을 배제하고 인간이 스스로 닫혀진 구도 속에서 기계적인 역사를 창출한다는 사상은 현대인들에게 얼핏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많은 파괴적인 양상을 창출하였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역사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인가? 스스로 존재하는 역사법칙인가? 섭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어떠한 사건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상의 세가지 관점에서 각각 그 사건의 의미를 조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A 라는 장소에 왔다고 하자. 우리는 그 이유를 묻는 물음에 대하여 “내가 오고 싶어서 왔지요.”라고 대답할 수 있고, 또한 “차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가능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처음 두 가지의 답변에 머무르는 차원을 성서는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전술한 어거스틴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한 그였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를 덧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성서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들에게 임하였다’는, 즉 자신들의 이웃 국가보다도 자신들이 더욱 사악하다는 고백을 하는, 그것을 할 줄 아는,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역사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백성들이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버터필드의 전게서 p. 61을 참조할 것.3. 역사의 제 유형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역사안에 어떠한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동양과 서양을 망라해서 나름대로의 역사에 대한 원리들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유사한 유형들이 있음을 쉽게 발견한다. 즉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리고 동양으로 올수록 역사는 보다 순환적이며 반복적인 역사의 유형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가까운 서양의 전통은 보다 진보적이며 발전적인 개념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성서적 기독교적 역사관은 이러한 양쪽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가. 순환사관순환사관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역사는 어떠한 진보나 발전없이 지나간 과거의 사회나 역사가 반복하여 출현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배후에는 주로 ‘신화’의 구조에 의하여 세계의 원리를 이해한 헬라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즉, 헬라의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은 이 땅의 인간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나 도덕적 근거로서의 신들이 아니었고 인간들과 거의 비슷한 운명에 사로 잡힐뿐 아니라 또한 결혼을 하여 또다른 신들도 낳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단지 죽지않고 능력면에서만 인간보다 뛰어나다. 인간들은 바로 이러한 신들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은 다분히 인간의 삶을 운명의 지배 아래에서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이해하였고, 인간의 역사 또한 어떠한 도덕적 의미나 교훈 혹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운명의 굴레 아래 순환 내지는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이러한 순환사관은 동양에서도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왕조사를 집필하면서 수없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왕조의 역사들을 ‘하늘의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였다. 왕조의 첫째 왕들은 이 사명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고, 필연적으로 이 사명을 망각하는 왕조의 마지막 왕은 멸망으로 운명지워졌으며 새로운 왕조는 이와같이 또다른 ‘하늘의 사명’에 입각하여 이 땅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사관 뿐만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 등에서 보는 종교사관에 있어서도 인간의 역사는 절대 억겁이라는 세월에 비추어 볼 때 일시적인 한 경점에 불과할 뿐이요, 이 역사는 다시 순환의 과정을 통하여 이 땅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는 한 싸이클이 4개의 ‘yugas'로 구성되어 각각 첫번째 ’yuga‘는 4,000년, 두 번째는 3,000년 셋째는 2,000년 그리고 마지막은 1,000년의 역사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들의 흥망성쇄를 이어 또 다른 싸이클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종교에서 세대를 4가지의 연속적인 세대로 구분하여 각각 금, 은, 철 그리고 이들의 합금의 시대로 구분하여 각각 흥왕과 쇠퇴의 연속과정을 대표하는 시기로 생각하는 이치와도 비슷한 것이었다.이러한 고대의 역사관을 어느 정도 극복하려는 의지가 고대 희랍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페르시아제국의 확장과 헬레니즘의 위기를 주로 그의 역사서술의 주제로 삼았던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경우 자신의 역사탐구의 목적을 크게 3가지로 서술하였다. 즉 첫째로 사실(Fact)의 탐구, 둘째로 가치(Value)의 탐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인(Causation)의 탐구라는 어느 정도 진 일보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그는 ‘원인의 탐구’라는 역사서술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오니아의 자연과학과 역사정신을 연계시킴으로써 역사의 과학적 이해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둔 듯하나 토인비의 지적처럼 헤로도투스도 궁극적으로 시간을 순환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의 ‘근대적’ 혹은 ‘과학적’ 역사가로 불리우는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와서 역사가 보다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 이전의 역사서술의 약점이 철학적 객관성을 주장하면서도 신화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물들을 바라볼 때 투키디데스는 그 사물들 자체의 관찰에 끝나지 않고 사건들과 사건들, 또는 인간들과 환경들의 상관관계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며 미래의 어느 싯점에서 같은 형식으로 반복될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분명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역사를 집필한다.” Thucydide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22, trans. Rex Warner(Harmondsworth, 1954), p. 13.고 고백했을 때 그 역시 역사를 순환적으로 이해하는 역사가의 큰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같이 고전적 사가들이 “진정으로 인간과 그들 행위의 동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실패”했음을 선포하고 이에 대한 참 원인의 규명을 모토로 등장한 것은 다름이 아닌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이었다.나. 히브리적, 기독교사관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은 고전세계의 순환사관과는 그 모습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순환사관의 헬라전통과 달리 히브리적, 기독교의 역사전통에서는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았다. 기독교역사관의 원류가 되기도 하는 히브리적 역사관 속에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기원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는 분명한 ‘역사적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역사 속에는 분명한 의미가 내재해 있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인으로서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언약 속에서 그는 히브리 조상들을 여행으로 인도하고 또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기도 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의 시작은 어느 시공상의 한 싯점에 이 세상을 무에서부터 창조하시는 야웨 하나님의 계획과 함께 시작되고 자신들을세상 속에서 ‘선민’으로 부르시는 과정을 통하여 그들을 훈련시키시고, 때때로 채찍질하며, 또한 그들에게 십계명의 전달자로, 계시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최종의 역사과정에 있어서 그의 선하신 목적대로 심판주로서 역사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이들의 역사관이었다.이러한 히브리적 역사전통을 등에 업고 기독교 사관은 배태되었다. 기독교는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히브리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역사속에는 인간의 타락과 그에 따르는 인간의 현존에 대한 보다 엄격한 현실이해가 뒤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죄인으로서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확고한 계시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구세주를 대망하였다면 기독교는 이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서 역사속에 개입하셨다’는 것이 그들의 선포의 내용이었다.이같은 히브리적, 기독교적 역사이해는 초대교회 시대에서부터 주변 세계와는 분명히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역사와 세계를 이해하는 초석이 되었다. 져스틴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맨트와 같은 이들은 유대인과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연속성 즉, 히브리적 전통의 완성자로서의 기독교의 모습과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육하신다는 기독교 사관의 교육적 목적을 변화하였다. 반면에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창조와 계약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이 속에서 이레네우스는 창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인간됨을 입고 오시는 바로 그 분과 동일한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역사를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였다 즉, 세상 창조의 순간에 이미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음을 강조한다. 한편 유세비우스와 오로시우스는 로마의 평화에 기초한 제국의 신학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제국은 더 이상 ‘적 그리스도’의 표징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지상의 실현으로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히브리적, 기독교역사관이 ‘직선적사관(Linearity)’으로 분명히 자리잡은 것은 고대말기, 중세초기의 어거스틴의 신학적 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거스틴은 주후 410년 여름 알라릭이 고트족을 이끌고 세 번째로 로마를 침공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이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묻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변증을 위하여 역사철학-신학적인 저서 ‘신의도성’을 집필하게 된다. 이 책은 모두 22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저서로 그의 ‘고백록’과 함께 대표적 저술로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 속에서 어거스틴은 두 도성, 두 국가, 하나님의 종들과 세상의 자녀들, 사랑의 나라와 자만의 나라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선인과 악인에 관계없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자세의 차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도성의 영원함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은 바로 이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서로 뒤섞여 있다. “이 두 도성은 최후 심판에서 서로 분리될 때까지 이세상에서는 서로 섞여 있고 또 꼬여있는 것이다.” 어거스틴, 신의 도성, 제 1권 1장, 34장.어거스틴의 역사이해는 이처럼 최종의 시한을 향해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직선적 역사(Linearity)”를 강조하는 역사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속에서 고대의 인간들이 “계속적으로 돌고 돌면서 입구도 출구도 즉 죽을 인간들의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역사관을 청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운명을 극복하는 도덕적 의지의 인간과 역사가 창출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분명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 의지 속에서 ‘하나님의 도성’의 도덕적 인간의 모티브를 발견한다. 즉 ‘하나님 사랑’으로서 ‘자기사랑’을 극복하는 도덕적 결단의 주체자요, ‘뜻없는 운명에의 굴복’을 거절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인 것이다.다. 진보사관진보사관은 일종의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의 세속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사관이 역사를 시작과 종말이 있는 ‘직선적(Linear)사관’을 견지하는 것과 같이 진보사관 역시 역사는 발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직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사관에서는 역사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역사는 자체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스스로 더욱 밝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스스로 성인이 되어가는 역사이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가는 역사속의 인간들은 스스로 더 큰 자유를 쟁취하는 역사의 주인공인 셈이다. 고대사회일수록 인간은 제왕이나 권력자에 의하여 자유가 구속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간은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더 맣은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계속적인 흐름은 미래로 나아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진보사관 속에는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미래를 늘 더욱 밝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 진보사관이 어떠한 두 싯점사이의 인간의 순례자적 여정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히브리적, 기독교사관과 흡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들에게는 역사의 시작은 창조도 아니요 또한 역사의 종말도 심판이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물론 어느 싯점에서 인간의 진보를 역행하는 짧은 기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서양의 역사에 있어서 소위 ‘중세암흑기’는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인간의 자유는 심하게 구속되었고 발전을 향한 인간의 역사는 잠시 퇴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은 일시적일뿐이다. 결국은 인간은 더 나은 역사의 길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진보를 향하는 인가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이러한 진보사관은 주로 18세기의 소위 ‘계몽주의’사상의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식의 명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인간을 역사의 중점에 놓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개입으로서의 소위 “계시”도 다름이 아닌 인간의 역사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인간의 이성의 연장인 셈이다. 계시와 함께 ‘섭리’에 대한 개념 또한 새롭게 해석되었다. ‘섭리’자체가 부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말은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자연적 인과관계의 틀속으로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이를테면 버넷(Burnet)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일 우리가 자연적 섭리(Natural Providence)에 대해 보다 공정한 사고를 유지한다면 사물의 기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필요 이상으로 기적이라든지, 제 1원인 등을 언급함으로 그 인과관계의 사슬을 너무 짧게 끊어서는 안될 것이다.” Burnet, Theory of the Earth, 2, p. 11. D.W.Bebbington, Patterns in History, p. 72에서 재인용.이처럼 섭리를 재해석하는 인간의 이성은 늘 합리를 추구하는 믿을만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성의 역할로 인간의 미래는 더욱 밝은 행복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19세기에 이르러서 주로 헤르더(Herder), 레씽(Lessing), 그리고 헤겔(Hegel)의 역사관에 힘입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헤겔(Hegel)의 역사관은 진보사관에 있어서 특히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세계정신의 자기구현’ 과정인 것이다. 이는 정,반, 그리고 합의 자기 변증법의 과정을 따라 제 3의 가능성을 항상 도출하는 역사의 계속이다. 따라서 역사의 최종 발전 단계는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현세라는 싯점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결론 아래 헤겔은 쉽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프러시아왕국을 진보의 종결점으로 보기도 하였다. 역사가에 있어서 에드워드 기브온(Edward Gibbon)같은 이는 “세계의 각 시대는 인류의 참다운 부와 행복과, 지식과 덕조차를 증대시켜왔고 지금도 증대시키고 있다는 유쾌한 결론” E.Gibbo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제 38장. 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길현모역 p. 146 에서 재인용.이라는 말을 자기 저작의 주제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주저없이 적어 넣었다. 이것은 이들이 크게 진보사관이 시대적 정신이었던 때에 저작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항상 이러한 진보의 개념에 영향을받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역사와 철학에 있어서 진보의 개념을 일단 자율화되기 시작하는 인간 이성의 영역과 내재적인 역사발전의 모티브에 힘입어 사회제반의 다른 영역에서도 함께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연에 있어서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의 개념은 그때까지 헤겔 등이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지만 자연은 진보함이 없는 확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등식까지 뛰어 넘는 새로운 가설을 소개하는 셈이었다. 다윈에 의하여 자연도 진화한다는 개념이 소개되면서 “진보”에 대한 신념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노동력의 창출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에 대한’ 원인의 분석으로 그의 ‘국부론’을 메우고 있다. 사회 경제의 국면에서도 발전과 진보의 개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루소는 ‘에밀(Emile)'에서 자연의 좋은 영향의 경험이 어떻게 이상적으로 아동을 자라게 하는가에 대한 낙관론을 교육학적으로 펼치고 있다.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진보사관의 영향이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슐라이에르 마허는 구원에 이르는 은총을 설명하면서 ‘신앙은 신에 대한 절대의존 감정’임을 역설한다. 이 속에서 그는 종래의 ‘구원이 위로부터 임한다’라는 기본적인 공식을 거부하고 인간의 주체적 선택을 더 중요한 구원의 요인으로 인식한다. 리츨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완성이 그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아들을 삼게되는 배경임을 이야기 하면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우리도 인간적인 자기 완성으로서 비로서 구속에 참여하게 된다고 보았다.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 진보사관은 커다란 딜렘마를 맞이하게 된다. 즉 20세기의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끔찍한 학살의 장면을 목격하는 인류는 진보사관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어렇게 이성의 합리성을 추구하여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는 인간의 행위가 600만 이상이나되는 인간들을 가스굴에 쳐 넣어 생으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진보’의 의미가 이러한 끔찍한 결과를 의미하는가? 칼 바르르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한 가운데서 ‘아니오(Nein)!’를 외치면서 성서, 특히 로마서에 나타난 인간성의 부패에 대하여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 앞에서 인간은 다시금 심각히 자신들의 심성을 장미빛 낙관으로 보아왔던 시각을 겸허히 반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기독교 사가인 라토렛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관이 반드시 진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진보가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진보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K. S. Latourette,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이석우역, 기독교와 역사이해 (서울: 성광문화사, 1989), p. 229-30.라토렛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진보의 기준이었다. 이 기준이야말로 기독교 고유의 역사인식의 준거인 바 이렇게 그 기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의 측정 기준은 기독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형상에 얼마나 가까이 갔느냐는 것이다.” Ibid., p. 230.그에게 있어서 어느 한 시대가 진보를 구가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안에서 소위 ‘진보사관’은 수많은 값비싼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비로소 그 원래의 뿌리가 되었던 히브리적, 기독교사관과의 화해를 다시금 약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 역사주의 다음으로 살펴볼 역사관은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주장이다. 역사주의는 주로 계몽주의 이래로 등장했던 이성을 신뢰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진보를 주장했던 진보사관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다. 역사주의에서는 진보사관의 역사가들이 이성을 기초로하여 더 밝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주로 간과했던 각 시대별, 지역별 역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각 시대별, 지역별 역사는 단순히 더 밝은 다음 세대의 역사를 위한 디딤돌 정도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한 사회, 한 단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철저히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를 조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상황에 대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는 단순히 직선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역사는 각 시대별로 자체안에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역사가 랑케(Ranke)는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시대는 직접 신에게 접속되어 있다...” Leopold von Ranke, The Theory and Practice of History, ed. G.G.Iggers (Indianapolis, 1973), p. 53.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역별, 시대별 역사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역사주의는 18,9세기의 내쇼날리즘(Nationalism)의 사성적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역사주의 사관의 옹호자들이 진보사관에 특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성’을 중요시했던 그들의 태도이다. 역사주의가 보는 역사는 단순히 가설에 입각하여 순수한 이성적 추론을 거쳐 추출되는 수학적 공리와 같은 산물이 아니었다. 역사는 인간들이 그 속에서 실제로 남겨놓은 ‘삶’의 흔적이며 어떠한 가설이나 공리가 아닌 것이다. 한 물건의 이모저모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듯이, 역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의 어떠함을 올바르게 파악해야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심정적 직관’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심성속에 시대를 뛰어 넘어서 그 어떠함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이성적 분석보다는 ‘이해’라고 불리우는 직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법은 이성적 분석보다는 ‘이해’라고 불리우는 직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역사주의사관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18세기 이태리 프로렌스의 비코(Giambattista Vico), 독일의 가테러(Johann Christoph Gatterer), 그리고 간접적으로 역사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아이디얼리즘(Idealism)의 칸트(Immanuel Kant), 낭만주의의 괴테(Goethe) 등이다. 비코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배격하는 일에서부터 그의 역사주의를 펼쳐나간다. 역사는 수학의 공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한 개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다. 인간은 실험을 통하여 자연의 오직 일부만을 이해할 뿐이다. 오직 창조의 주인인 신만이 전체적인 사실에 대하여 알고 있다. 역사적 지식은 과거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인간들 자신의 마음을 잘 연구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비코는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그들의 신이 개입하심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외의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는 인간들이 그들 역사의 주인이라고 봄으로써 기독교적 역사관을 부인한다. 이러한 역사에서의 인간이 주체라는 사관은 포이에르바하(Feuerbach)를 거쳐 다음에 등장하는 칼 막스(Karl Marx)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칸트에 이르러 모든 것을 이성의 진보에서 찾으려던 진보사관은 일단 제동이 걸린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 혹 정신은 인간 밖의 세계를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감각적 인상들에 ‘범주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범주들(이를테면 단․복수의 개념, 원인, 그리고 필연 등)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기능은 단순히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 이상이다. 인간의 총체적 ‘정신’이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이성을 포함한다. 이와같이 넓은 의미의 소위 ‘관념들’이 세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관념주의(Ideal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같은 칸트의 관념을 통한 지식의 획득은 감정, 상상력, 통찰력, 직관 등의 덕목을 중요시하는 역사주의와 쉽게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괴테 등의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모든 만물에 신성이 있다는 사상 역시 역사주의가 선호했던 사상이었다. 자연을 포함하여 인간의 역사, 그리고 모든 사물들을 이러한 애정으로 바라보고 싶어했던 것이다.이러한 역사주의의 방법론인 ‘직관’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뒷받침하여 인식의 해석학적 통일을 가져오고자 시도했던 것은 딜타이였다. 왜냐하면 딜타이 자신도 역사에 있어서 실존적인 인간의 경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개개인의 ‘직관’에 역사해석을 맡기는 것은 너무나도 주관성이 강한 것이고 따라서 자의적인 역사해석을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또한 알고 있었다. 실제로 헤르더(Herder), 드로이센(Droysen) 등의 자의적 역사해석을 힘입어 독일은 군국주의를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Nationalism)운동들 역시 개별 국가를 지나치게목적으로 보는 역사주의적 방법론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딜타이는 이러한 자의적 역사해석을 막는 해석학적인 원리를 제공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얼마나 많은 역사주의 사가들이 통일성있는 해석학적 원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마. 마르크스주의사관이제 마지막으로 막스주의 사관을 살펴보자. 마르크스(Karl Marx)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선구자격이었던 헤겔의 역사관을 이해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헤겔은 카아(E.H. Carr)가 지적하듯이 기독교사관의 섭리의 법칙을 이성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은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철저한 추종자였다. 헤겔은 세계정신의 합리적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개인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속에서 등시에 그 이상의 일을 달성한다’고 보았다. E. H. Carr, op. cit. p. 179.그에게 있어서 역사상의 발전은 자유의 개념을 향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의 개념의 공식은 갖추었지만 그 내용은 없는 것과 같다’고 19세기 러시아의 문인이었던 헬젠(Alexandr Ivanovich Herzen)은 비판한다. Ibid., p. 180.아담 스미스와 헤겔의 제자였던 마르크스는 세계가 합리적인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사고방식에 출발한다. 헤겔의 입장과 같은 것이긴 했지만 이보다 좀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취한다. 그는 “법칙에 지배되는 세계가 인간의 혁명적인 이니셔티브에 대응하면서 합리적 과정을 통하여 발전한다는 견해에로의 전환을 이룩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적인 견해를 종합해보면 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법칙을 따라서 전개된다고 한다. 즉 이 세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룸으로써 한가지 합리적 과정을 연출한다고 보았다. 첫째는 역사가 객관적인 주로 경제적인 법칙을 따라서 전개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에 대응하여 변증법적 과정을 통하여 이룩되는 사상의 발전이며, 마지막으로 이에 따른 계급투쟁의 형태하의 실천이라는 것이다.역사의 진보의 과정은 헤겔식의 관념을 통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경제적 조건의 진보로 말미암고, 이러한 진보는 계급투쟁의 실천을 통한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역사 속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자본주의의 분배적 모순을 극복하고 이른바 ‘사회적 공산주의’의 실현으로 역사의 진보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갈등은 정신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욕구에서 시작되었다. “국가안의 모든 갈등, 민주주의와 귀족정치, 군주정치간의 갈등, 선거구 내의 갈등 등은 단지 서로 다른 계급들이 싸우는 진짜 갈등이 환영적인 형태로 보여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Marx and Engels, The German Ideology, ed. and trans. by R.Pascal, Part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39), p. 24. 김기홍, 역사와 신앙 (서울: 두란노서원, 1990), p. 45 에서 재인용.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계급투쟁을 통한 ‘유물사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진보사관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레닌의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소위 지구상에 ‘공산주의’의 출현으로 가시화되긴 했지만, 그의 유물사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끊임없는 비판의 소리를 면할 수 없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위대한 예술적 성취도 빵, 의복, 집을 얻기위한 인간의 행위였는가? 세익스피어의 희극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오로지 빵을 위한 인간들이었나? 미국의 역사 속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경제적 욕구가 인간의 행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극적인 노예해방이라는 사건이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작금의 20세기 후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국가의 해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역사주의’가 그래도 인간 속의 ‘정신’을 통한 이상을 잃지 않고 이를 추구하는 노력을 보이는데 비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결론이상의 역사에 있어서 제 유형들은 그 강조점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을 제외하면 역사의 유형을 순환에 의한 ‘운명의 힘’이나 인간 자신이 신적 개입을 배제한 이성, 혹 총체적 ‘정신’, 그리고 이를 넘어선 ‘물질’의 원리 속에서 찾고 있다.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이 역사속에 하나님의 개입을 ‘섭리’의 차원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선민집단의 역사 속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구속사’로 불리우는 성소 속의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는 히브리적, 기독교사관의 중심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사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히브리인, 혹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자의적인 역사이해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세계사와 성서 속의 구속사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적 역사관’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규명해야하는 주제일 것이다.4. 일반사와 구속사의 상관관계최근의 기독교 역사 신학의 범주에는 일반 세계사와 구속사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라는 신학의 출현과 특히 로마 카톨릭의 ‘제2 바티칸 공의회’ 신앙 선언 이후에 더욱 활발히 거론되는 신학적 주제로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창조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그 세계의 ‘관리자’라는 신학적 통찰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즉 세상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역사속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기 위하여 그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훈련시키시어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파노라마식의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그 입안자와 관리자가 되시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더 나아가 구속사적 경륜과는 상관없이 보이는 일반 세계사의 흥망성쇄에도 하나님의 실제적 주권이 내재해 있음을 고백하는 시각이다.이러한 일반 세계사와 구속사와의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 판넨베르그(Pannenberg)는 구속사와 세계사의 통일성을 언급하면서 “구속사를 일반적인 사건과는 다른 종류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미리 앞당겨 일어난 구속사는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원칙상 이성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상 인식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별개의 것이다” W.Pannenberg, Heilsgeschehen und Geschichte, in: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S.47.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p.360.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판넨베르그는 구속사와 일반 세계사의 질적 구분을 용인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안에 있음을 뜻하며, 역사는 그의 창조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역사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는 구원의 사건들이요, 이 사건의 역사가 곧 세계사이다. 그러므로 역사, 곧 세계사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Ibid. p. 113판넨베르그는 성서 속의 묵시 사상가들이 바로 구속사를 보편사 곧 보편적 세계사로 확대시킨 인물들의 대표적인 예라고 보았다.그렇다면 피와 음모 그리고 암투 등으로 점철되는 세계사의 부분들도 구속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구속사는 일반 세계사와는 구분이 되지만 그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는 것이 주로 오스카 쿨만 등의 구속사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의 입장이다; “구속사는 역사안에서 전개되며 이러한 뜻에서 구속사는 역사에 속한다. 구원사는 역사 옆에 나란히 있는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니다. 구속사는 점진적 감소와 점진적 확대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즉 창조-인류-이스라엘-남은자들-예수 그리스도라는 감소의 형식으로 일어나며, 예수 그리스도-사도들-최초의 공동체-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회-세계라는 확대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O. Cullmann, Christus und die zeit, s. 141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p.215.고 한다. 이에 비해 바르트는 구속사를 ‘모든 역사의 지속적 위기’라는 형태로, 또한 몰트만은 역사의 의미를 보편사 속이 아닌 ‘개인의 실존’ 속에서 각각 찾고 있다.이상의 이론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관점은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계사와는 구분이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구속사는 세계사의 밖이나, 개인의 실존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전 역사를 포함하는 미래적 지평을 가지고 전개되며 따라서 종종 세속사의 역사과정 속에서 구속사적인 영적 모트비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라토렛(Kennet Scott Latourette)교수는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History”에서 기독교 신앙과 학구적 역사가 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전체 인류를 배경으로 놓고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전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우주적이기에 기독교 역사를 개괄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서술의 주요 단계마다 그것을 우주적인 배경에 비추어 관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K.S. Latourette, 기독교사(상), p.22.고 보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도슨(Christopher Dawson)이 ‘The Dynamics of World History'에서 역사의 핵심적인 원동력은 종교라고 하면서 동양 문명에도 비판적인 차원의 기독교적 역사해석 연구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구속사는 본질적으로 보편적 역사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속사는 역사내에 있는 한 과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좁은 한 과정은 그것으로 끝이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속사와 세계사의 철저한 구분을 주장하는 바르트의 개념 즉 “하나의 은폐된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안에서 활동해 오셨으나 ‘구속사’에 위배되지 않게 활동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사는 그 자체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세계사를 위하여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속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을 구원하는 데 있다. 한편 보편적 세계사는 구원사의 외적인 근거를 형성한다. 일반 세계사의 목적 역시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구속사를 위해 봉사하며 그 목적이 성취되는 자리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B. 기독교 세계관 모색을 위하여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동물이다. 이 두가지 명제를 합하여 말하자면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가 인간의 행동과 삶의 양식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결단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되는 법이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소유하는 사고의 유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는 그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라는 책에서 세계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면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혹은 가정)들이다”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p. 19.이 세상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우리는 그렇다면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어떠한 경로를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가? 성서적 기독교에서는 과연 이 세계의 구성에 대하여 어떤 전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동․서양의 세계관을 포함하여 제반 세계관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따라 커다란 세계관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고에서 주로 첫째: 서양사상의 흐름을 一考함으로써 오늘날 세계관의 흐름을 간파하고 둘째: 바람직한 성서적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세계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본보기를 제시함으로써 본 단원의 과제를 수행해 보는 것으로 범위를 제한해 보기로 한다.1. 현대인과 세계관가. 고대사회의 물활론(Hylozoism)과 ‘인격성’에 대한 개념근대과학의 성격을 규명하는 글을 쓰는 가운데 종교사가이며, 또한 예술사가이기도 한 쉐퍼(Francis Schaeffer)는 “근대과학은 ‘닫혀진 체계 속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에 대한 탐구로 그 성격을 규명할 수 있다”고 간파하였다. Francis Schaeffer, Escape from Reason,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시작하는 전제즉 자연의 궁극원리를 규명하는 과학의 정신이 세계내적 제원인들로 말미암는 원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과학 정신의 뿌리를 캐나감에 있어서 쉐퍼는 그 사상사적 원류를 ‘자연과 은총’의 종래의 구분을 포기하고 ‘은총’의 상층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후의 철학, 신학사조에서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이러한 근대과학, 철학의 정신이 소위 ‘의미’를 찾는 ‘반정립(反定立)’의 사고구조를 더 이상 포기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비약 즉 우연성, 즉흥성, 무의미성 등으로 규명될 수 있는 갖가지 삶과 문화, 그리고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쉐퍼의 지적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필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고대사회의 물활론(Hylozoism)에 까지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찾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기독교와 고대문화’의 저자인 코크레인(Charles Norris Cochrane)은 고대사회속에서 물활론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가운데 물활론 체계의 전제가 바로 ’닫혀진 세계속에 상호관련성‘으로 자연의 변경을 규정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Charles Norris Cochrane, 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 p. 422.이러한 닫혀진 체계의 관련성에서 소위 ‘물활론’ 이라 일컬어지는 물, 불, 공기, 땅 등의 요소들( , elementa mundi)이 사물의 궁극적 인식이 되기에 이르른다. 이와같이 물(Thales), 공기(Anaxamenes), 불(Heraclitus), 규명할 수 없는 어떤 요소(Anaximander), 그리고 어떤 제한된 형태( , Phytagoras) 등으로 사물의 궁극적 존재를 인지함에 따라 이것이 가장 첫째되는 원리(Arche) 혹은 근본(Causa Subsisterdi, Causa principiunque rerum) 등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첫째 원리(Arche)는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과 ‘되어가는 것’에 대한 두번째의 원리 즉 ‘운동의 원리’(Ordo vivendi or finis omnium actionum)를 찾기에 이르렀고 이 원리는 곧바로 세번째 원리 즉, ‘지성의 원리’(Ordo or ratio intelligende, lumen omnium rationum)를 필요로 하는데로 발전되었지만 이 모든 소위 ‘원리들’의 배경에는 역시 닫혀진 체계로 존재의 개념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고전세계 내지는 고대사회의 진리 체계속에서 기독교의 ‘3위일체 하나님’(Trinity)의 개념은 하나의 폭탄과 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서 시작된 ‘진리체계의 인격성’에 대한 탐구는 어거스틴(Augustine)에게 이르러서 그 절정에 이르렀던 바 어거스틴은 아타나시우스의 ‘희랍적 구조의 3위일체’를 보다 역동성있는 상호 관계성 속에서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인격적 하나님”의 모습으로 돌리는 데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어그스틴이 보는 ‘3위일체의 하나님’은 서로 관계없이 존재하는 ‘존재자(Being)’일 뿐 아니라 ‘사랑의 매는 줄(Binclum Caritas)’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되어져가는(Becoming)’, 곧 인격적 관계를 수반하는 그런 역동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동성을 수반하는 ‘인격적 진리’가 ‘닫혀진 체계’ 속에서가 아니라 ‘열려진 체계’ 속에 존재하며 이 진리가 실존한다는 사실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의 삶의 경험을 소개하였고, 이로부터 추출할수 있는 ‘진리의 인격성’을 소개하는 셈이 되었다.이러한 입장에서 니케아(Nicene)신조 이전의 기독교와는 달리 니케아 이후의 기독교는 더 이상 이방세계의 ‘과학’을 두려워할 필요없이 대담한 자세를 가지고 ‘모든 진리는 기독교의 진리(All truth is Christian truth)’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애굽을 점령하자(Spoil the Egyptians)!’라는 실천적 구호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기독교와 고전주의 철학 사이의 갭을 줄일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러한 과정에서 ‘믿음의 진수(The Essentials of the Faith)’는 타협할 수 없고 또한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Ibid. pp.359-360.나. ‘보편개념’을 둘러싼 중세인의 경험근세 철학, 신학의 탄생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Scholasticism)의 중요한 논제였던 ‘보편개념’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겠다. 중세의 소위 ‘스콜라주의’는 신학과 철학의 대화를 통한 진리에의 접근을 모색함으로써 성립된 철학적 신학체계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철학과 신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진리로 접근하는 방법의 차이라고 보았다. 곧 신학은 계시된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이르고 철학은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연 경험을 초월해 있는 본질에 도달하는 데 양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곧 신학은 성서의 가르침에 의해서, 철학은 이성적 성찰의 결론으로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보편’의 개념에 있어서도 아퀴나스는 온건한 실재론을 지향하였다. “보편은 스스로 자조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 즉 보편은 사물안에(in re), 구체적인 사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보편들은 사물에 앞서서(ante rem) 하나님의 마음속에 실재하는 데 분리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 실재한다. 마지막으로 보편은 사물보다 후에(post rem) 추상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Thomas Aquinas, Summa Contra Gent. 1:65., Summa Theologia, I, q. 55. art. 3, q. 85. art. 2 등에서 언급하는 보편개념이렇게 함으로써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과 신적 실존에 대한 조화를 시도하였다.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도 구원하는 사랑(Charity)은 인간 자신의 것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자발적인 행위이어야 했다. 그는 “Faith is formed by love” 라는 구호 아래 영혼 속의 은혜는 인간의 타고난 실재 즉, 비록 그 기원이 신적인 것이라고 해도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이 인간의 habitus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면서 ‘finitum capax infinitum’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은총, 혹은 은혜라고 하는 상층부의 개념이 이성, 혹 합리성이라고 하는 하층부의 개념과 분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양층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한 이성의 활동을 통한 철학으로서 보편적 상층부의 개념에 이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스콜라주의의 전제는 곧 이어서 등장하는 오캄(William of Ockham) 등의 유명론자들의 등장에 이르러 해체되어가는 양상을 띄게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보편은 다만 명치이고 사물 다음(post res)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보편개념은 사물에 앞서서도 또 사물안에도 존재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는 단지 인식 주관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사고의 산물로 보았다. 이러한 유명론의 입장에서 오캄은 추상적 지식에 대해서 직관적인 지식 즉, 내적 및 외적지각을 중시했는데 이와같이 생각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경험적인 직관적 지식위에 기초지워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당연히 학문으로서 성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오캄에게 있어서는 지식(이성)과 신앙의 분리는 불가피한 결론이었다. 이로써 신앙을 이성에 적합하게 정립시키려는 스콜라철학의 고유한 목표는 해체되고 철학상의 진리와 신학상의 진리가 서로 전혀 구별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중진리설’의 입장에 서면 철학은 더 이상 교회의 교의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로이 자신의 영역속에서 탐구를 행할수 있게 된다. 소위 근세철학의 탄생은 이러한 흐름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신의 개념은 오로지 신앙의 대상이지 철학내지 학문적, 또한 이성적 추구의 대상은 되지 못하는 셈이었다.다. 자율화된 이성의 세계; 근대사고의 형성계몽주의 이후의 사상은 모든 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이때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이성’ ‘자연’ ‘자율’ 등이었다.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은 자연의 법칙과 잘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인간을 무지와 미신에서 자유케 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땅은 점점 질서를 잡아가고 낙원이 되어 갈 것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모든 전통이나 귄위는 이성의 도마위에서 시험을 당한 뒤에야 받아 들여졌다. 일단 이성의 영역이 자율적으로 독립하면서 은총이나 신의 보편적 영역들은 쉽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이성만능주의’의 사조가 찾아오는 것이다. 볼테르(Voltaire)는 “자연이 인간만을 위해서 가지고 있던 완전의 단계에 인간이 도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태양이 모든 지성의 자유인들에게 비칠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이성외에는 주인이 없었다. 즉, 상층부의 세계는 잠식당한채 또 다른 ‘폐쇄된 세계 속의 자율’이 범람하는 시대적 경험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 사조는 헬라사상의 확장이었다. 김기홍, 역사와 신앙, 두란노서원, 1990. p. 41.라. 키에르케고르의 ‘비약’과 근대신학근대철학이 합리성의 영역에서 신앙을 내어줌으로써 신학과 합리적 이성에 괴리가 생긴 이후 19세기의 실존적 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의식을 신학에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그는 중요한 것은 모두가 신앙의 비약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합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을 신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합리적인 것과 신앙의 영역은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귀결로서 쉐퍼는 “만일 합리주의적인 인간이 인간생활의 실제적인 것들 즉, 목적, 의미, 사랑의 타당성 같은 것을 취급할 경우 합리적 이성을 버리고 부득이 거대한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다.”라고 언급한다. Francis Schaeffer, God who is there, 기독교와 현대사상, p. 28.합리적인 것 혹은 논리적인 영역의 이성활동의 결과는 개별적인 것, 무목적, 무의미, 그리고 인간을 하나의 기계 이상으로 보지 않는 개별자적 존재로의 이해가 불가피하고 오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약속에서만 궁극적인 경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비약(Leap)’에 관한 개념은 오늘날 근대 정신세계와 현대신학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마. 현대신학에 대한 조명; 현대인의 세계관의 단면불트만(Rudolf Bultmann)은 신앙과 역사를 단절시키는 역사관을 가지고있었다. 기독교는 그가 보기에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현재 신자들의 경험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더 관심을 쓰고 있다. 그는 “역사의 의미는 언제나 현재에 있고, 현재가 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현재로 느껴질 때 역사에 있어서 의미는 실현된다.”고 보았다. Carl Braaten, history and Hermeneutics, Westminster, 1966. p. 133.그에게 있어서 이천년전에 역사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된다. 그것이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가 중요하다. 아마도 불트만이 역사와 신앙을 분리하는 사고를 주장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초자연적 상층부의 존재를 믿지않는 20세기의 사람들을 향한 “복음의 재해석을 위한 시도”에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예수가 물위로 걸었다든지, 귀신을 좇아냈다든지, 육체로 다시 부활했다든지 하는 내용은 복음의 본질이 아닐뿐 아니라 해로운 것이라는”것이다 불트만은 소위 ‘신앙’은 합리성이 결여된 즉, “세계(혹 과학)와 역사와의 접촉의 결여”라는 형태로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합리성은 ‘과학적 증명과 역사를 포괄하는 것이다’라고 볼 때 이제 더 이상 비합리적, 신화적 요인들을 이야기하지 말고 오늘날 우리의 실존에 필요한 합리적인 그리고 비신화적인 요인으로 복음을 재해석하자는 것이다.로빈슨 등의 ‘신의 죽음의 신학’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까지 포함시켜 모든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믿는 나머지 제거해 버리고 있다. 신의 죽음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을 때 그들은 현대의 세속적인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은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신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But that he never was)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들을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자”라고 호칭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데 이들과 낙관주의적 휴머니스트들과의 실제 사고구조속에서 별다른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틸리히 역시 기독교의 신앙이 나사렛 예수의 실제 삶과 죽음위에 세워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그의 신앙의 개념은 아무런 객관적인 지식위에 세워져 있지 않고 역사적 인물 예수와 관련도 없다. 틸리히는 오로지 “역사의 실존적인 의미에 관심이 있다. 즉, 보편역사가 아닌 초역사에... ” Paul Tillich, The future of Religions, p. 33.그는 존재에의 용기에 대해 “아무도 또는 아무것도 자신을 받아줌이 없어도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용기로 정의하였다. Paul Tillich, Courage to be. p. 185.틸리히에게는 ‘절대적 신앙’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아무 또는 아무것도’없이도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러할 때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의 개념을 초월한, 어떠한 객관적 계시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는 ‘신을 넘어서는 또다른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는 ‘기도하지 않고’ 다만 ‘명상할 뿐’이라고 종종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하곤 했다 한다.현대신학이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인간의 실존적 의미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폐쇄된 체계속의 존재’로 갇히게 하던가, 아니면 비합리적인 비약을 통한 비인격적 신과의 만남을 그 주제로 설정하는 분위기를 배태하였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인격적인 성품을 가진 신과의 만남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찾으려 했던 교회사속의 많은 인물들의 시도는 오늘날 ‘낡은’ 신앙의 모습일까? ‘열려진 세계’의 본질 개념은 아마도 ‘인격적 하나님’의 개념일 것이다. 오늘날 근대과학의 정신적 근간이 고대 희랍의 ‘물활론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 인격적 진리를 고수하는 전통의 부활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할 수 있겠다.- 맺는말이상에서 현대적 세계관의 일단을 형성하는 서구사상의 흐름을 일견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관이 존재하겠으나, 본고에서는 서론에서 밝힌대로 이상의 범위로 제한한다. 이제 이어서 성서적 기독교의 세계관에 대한 전제를 살펴보기로 하자.2. 성서적 기독교 세계관성서의 세계관을 정리하기 위해 편의상 신의 본질과 속성, 우주의 본질, 인간의 본성, 인간의 사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윤리의 기초와 역사의 의미 등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먼저 신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기독교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시작 이전에 스스로 혼자 계셨으며, 그 분은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교류속에 계셨고, 무로부터(ExNihilo)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세상의 보전자로 세상속에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섭리를 펼쳐나가시는 분이라는 전제이다. 삼위일체의 인격적 교류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대표되는 ‘3위격의 하나님’이 또한 전체적으로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를 이루고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께서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 분이 창조의 주인이심을 의미하는 동시에 어떤 ‘필요(Necessity)’나 ‘강제(Enforcement)’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하심(Goodness)’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대화시킬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초월의 존재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역사에 내재하시어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나 역사의 한 싯점에 ‘인간과 세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성육신하신 분이시다.하나님의 ‘선(Goodness)하심’은 두가지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나타나는 바 거룩은 악의 그림자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절대 공의를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라는 말씀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선은 또한 사랑으로도 표현된다. 요한은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 4:16)고 가르친다. 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두 번재로 우주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개방체계(Open System)’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Uniformity)’로 운행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 ‘개방체계’ 속의 ‘인과율의 일치체’라는 용어는 프란시스 쉐퍼의 것으로서 그 의미는 먼저 우주는 무질서하게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주의 질서는 명료하며 이러한 질서속에서 내일도 ‘해가 뜰것’을 예견하게 된다.또 다른 의미는 우주는 이미 프로그램화되어버려 폐쇄된 형태가 아닌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우주의 운행의 전개 유형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신론 등에서 보는 ‘폐쇄된 체계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니며 따라서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세계관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개방체계’에 대한 신념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진행에 관여할 뿐 아니라 인간도 역시 우주의 재조정(Reordering)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이 세계를 잘 보전함으로 공해없는 세계로 만들든지, 아니면 심각한 생태계의 유발을 가져올 각종의 행위로 다시금 우주의 질서를 재편할 수 있음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세계는 인간과 하나님에 대하여 그 미래가 열려있는 것이다.세번째, 인간의 본질에 관한 기독교의 세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고 시공상의 한 싯점에 인간은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어 자기의 자녀로 부르시어 영화스럽게 하신다는 점이다. 먼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자기초월성, 지력,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무소부재하거나 전능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그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스스로 손해를 각오하며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자기초월의 존재이며,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창의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그와 교제를 나누며 살도록 초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성을 공유하면서 피조된 인간은 시공상의 한 싯점에서 창조주가 유일하게 금하신 명령을 어김으로써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자유도, 관계를 끊을 자유도 주셨던 것이다. 이후 인간의 도덕성, 자기 초월성, 지력, 사회성 등에서 심각한 결손을 야기하는 각종의 딜렘마를 초래한다. 다시말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 것이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질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 세계에 각종 질병, 전쟁, 갈등 등이 생기게 됨은 이러한 타락의 결과였고, 이제 피조물은 심각히 자신의 구속을 신음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전락된 것이다.이러한 인간이 구속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이해하는 ‘복음’의 의미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즉 자기를 버리고 떠난 인간을 향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구속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소외상태를 극복하고 자신과 다시금 화목하기를 바라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근본적 은혜와 풍성한 사랑을 통하여 사람들은 다시금 새 생활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피조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 즉 인격성, 자기 초월성, 도덕성 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영화로운(glorified) 삶에 이르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영화로운 삶이란 하나님, 이웃, 그리고 자신과 화평을 누리는 상태의 삶을 의미한다.네번째,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 및 그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윤회의 시작도, 무에로의 진입도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변형된 모습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존재상태인 영화된 존재로 변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믿음이다.마지막으로 윤리의 근거는 초월자이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즉 사랑과 거룩함에 근거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인간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렇듯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윤리적 준거를 얻게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불렀다.(고.전 15:45-49)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도덕적, 윤리적 삶의 본을 보이셨음을 의미한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이 시험은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시고, 또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메어다는 인간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사랑의 차원을 인간들에게 윤리적 준거로 보여 주셨다.이상에서 본 바 대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하나님의 장엄하심’에 있다. 오직 그 분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이것이 이 세계관을 사는 사람들의 고백인 것이다.3. 기독교 세계관의 실제: 기독인의 삶과 소명이제 우리의 논의의 마지막으로 역사속에서 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을 소유하면서 이 땅에서 그러한 삶을 살다가 간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소명’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삶을 교회사적 조명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가.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인의 삶과 소명기독교 복음의 시작은 유대교로부터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유대교를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근원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다!’라는 복음의 인식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직접 그 앞에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자신의 죄를 위해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성서의 발견은 그들도 ‘하나님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야하는 자각을 갖게 해 주었다. 이것은 소위 ‘만인제사장직’이라는 교리적 발견인데 이것은 루터의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강조된 것만은 아니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미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이러한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직”에 대한 이해가 폭 넓게 다루어진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영적은사를 받았다. 이 가르침에 예외적인 신자는 아무도 없다.” 거룩한 사도들의 헌장, 제8권, sec. 1, Anti-Nicene Fathers vii, p. 480.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한 모든 기독인이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게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위해 쓰임받는 위치에 놓여 있게 된다.5세기 교부중 한 사람인 라베나(Ravenna)감독 피터 크리소로구스(Peter Chrysologus)는 모든 기독인이 사제직에 비견되는 나름대로의 소명을 받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자, 이제 우리가 사도들의 권면을 귀담아 들읍시다. “네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이와같은 권면을 통하여 사도는 모든 기독인들을 사제직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면서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희생제물이며 동시에 제사장이 되셔야 합니다. 거룩한 권세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직분을 누리되 거룩함으로 옷입고, 정절로 띠를 띠우시기 바랍니다.” Peter Chrysologus, sermons, 108, Fathers of the Church 17, pp. 168-169.이와같은 기독인의 소명은 초대교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금욕적이며, 계율적인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했으며 “기도보다 금식이 더 좋으나, 그 둘보다 더 좋은 것은 자선이다”라는 모토 아래 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나. 중세인의 경우; 성, 프란시스의 삶중세교회의 경우 “기독인의 소명”에 대한 자각은 주로 수도원 운동의 역사와 함께 이해되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나벤투라(1212-1274)는 특히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경우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자신의 전 인생을 드리는 한 기독인의 헌신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프란시스의 가슴속에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셨다. 그의 유아기 시절부터 그의 마음은 무한한 관대함으로 가득 채워졌던 바 그는 복음의 부르심에 대해 벙어리가 되지 아니하고 구걸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는 모든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 것을 결심하였다.” Bonaventure, The Life of St. Francis.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 p. 186.이러한 프란시스의 결심은 실제로 모든 가난한 자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넓은 사랑의 실천을 베풀기에 이르르며 그의 빈곤, 겸손, 그리스도의 명상으로 이어지는 절대적인 소박한 삶의 모범은 중세 교권주의로 타락되어가는 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는 운동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프란시스의 선행은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시는 한 “소명” 내지는 “비젼”을 통한 것이었음을 보나벤투라는 전하고 있다. 즉 그가 아직 자기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세속적인 사업에 관계하고 있었을 때 그의 집에 한 남루한 기사가 찾아와서 동냥을 한다. 좋은 가문에 태어난 기사였지만 그의 가세가 기울어 옷도 제대로 입지못해 떨고 있는 기사를 본 프란시스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에게 덮어 주는 데 그 일이 있은 그날 밤 프란시스는 꿈 속에서 찬란한 궁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려진 수많은 무기들이 있는 것을 바라본다. 이것들이 누구것이냐고 프란시스가 물었을 때 그것은 자신과 그가 낮에 도왔던 기사의 것이라는 음성을 듣고 프란시스는 잠에서 깨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형통함을 보여 주심을 믿고 마태복음 13:44-46의 지혜로운 농부와 같이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밭에 감추어둔 보화를 사는 심정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살아간 기독인의 한 모습이 아닌가 한다.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인의 삶, 소명”종교개혁기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기독인의 소명”의 주제가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통해 기독인들의 삶이 어떠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으로 직접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된 기독인은 이제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담당하는 ‘이웃사랑의 소명’에 부름을 받아 타인을 위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의 윤리는 참다운 세속화를 지향하는 ‘수도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한 복판에서’ 기독인의 소명과 부르심을 실천하는 과제로 표현되는 것이다. 기독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위해 “게으르지 않고,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보존하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들을 행해야 한다.” 그런 후에 이제는 “빈궁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엡 4:28)” 자기 몸을 돌아 볼 뿐더러 지체되는 자신의 이웃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심, 혹 소명의 동기는 무엇보다도 ‘사랑’인 바 그리스도이들은 억지로나 율법의 요구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러나오는 실천자인 것이다.칼빈의 경우에는 ‘기독인의 소명’을 살게하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의 발견이 매일 매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지침 내지는 인도자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시 19:8-9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의 말씀과 시 119:105 의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같이 적극적인 율법의 기능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주인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종의 모습처럼 기독인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율법은 그 자체가 현대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축복’ 혹은 ‘하나님의 현현’과 같은 것으로서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닌 ‘기독인의 세계관’을 더 철저히 살게하는 좋은 채찍이 되는 것이다.라. 근대교회에서의 교훈종교개혁자들의 뒤를 이어 근대교회를 넘어 오면서 교회의 부흥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독인의 소명’의 절박성과 이를 검증하여 개개인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다. 영국의 청교도로서 영적부흥의 기수이기도 했던 리챠드 박스터(1615-1691)는 기독인의 소명을 고취한다. 또한 ‘예수회’를 창시하여 중제 도미니크와 프란시스의 수도원 운동의 부활을 꿈꾸었던 이그나티우스로욜라는 각 기독인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확인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확증하고자 할 때 다음의 4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첫번째 법칙은 나로 하여금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역사한 사랑이 위로부터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나의 최종의 선택이 하나님 사랑 때문이 아닌지를 살펴볼 기회가 됩니다. 두 번째 법칙은 내가 한 번도 보거나 만난 적이 없는 한 사람에게서 온전한 모습의 사람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가정을 전제해 봅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가 선택하여야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그에게 충고를 한다고 합시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나의 선택을 위해서도 다른사람을 충고할 때와 같은 방법을 적용하여 봅시다. 세 번째 법칙은 내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다고 가정하여 보고 지금 내가 선택한 이 선택이 그때 어떠한 영향과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하여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가 설 때 지금 내가 한 선택이 어떠한 모습으로 비쳐질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Ignatius Loyola, spiritual Exercises, pp. 103-104.이처럼 ‘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늘 자신의 선택이 최선인 것인지를 되물으며 사는 삶이었다.참고문헌 (Bibliography)Brehier,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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