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A. 토레이 著「성령론」
1~4장 요약
Ⅰ. 성령의 인격
성령께서는 한 인격자이시다. 오늘날 성령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생각이 많은 이유는 성령을 인격자로 인식하지 않고 그 역사(役事)하심만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기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고 극히 실제적이다. 성령이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을 원만히 받지 못한 사람이며 기독교적인 신관(神觀)을 확실히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1)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예배에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성령이 비인격적인 감화력 혹은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령께 드려야 할 예배를 약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과연 우리는 성령께 예배드리는가? 물론 찬송의 가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이론적인 말이나 노래를 한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 노래의 뜻과 힘을 확실히 깨닫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2)성령을 인격자로 아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성령을 한 감화력이나 능력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을 붙잡아서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결국 자만심과 자고심(自高心)과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성령을 받았다고 광신(狂信)하는 나머지 자신을 특별히 뛰어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가지신 인격자라로 믿는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나를 이용하시게 할 수 있을까”라고 소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희생하고 겸손해야 되겠다는 생각 밖에 다른 것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겸손한 태도와 생활은 성서의 위대한 진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3)성령에 대한 인격의 교리는 경험상으로 보아서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신자들이 성령이 한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의 신앙경험과 봉사정신이 전적(全的)으로 변하였음을 간증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제목의 설교를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성령의 인격에 관한 설교이다.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말하였고, 이에 관하여 서신으로 묻기도 하며 간증도 했다.
2. 성령이 인격자이심을 증명하는 네 가지 사실
1)성령의 인격의 특성이 모두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인격의 특성은 지(知), 정(情), 의(意)이다. 그러나 성령이 인격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과 같이 수족과 이목구비를 가지신 것은 아니다. 모양은 인격의 표시가 아니라 사람의 형체의 표시이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지상 생활이 끝나게 된다면 우리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할 것이다.(고후 5:8) 그러므로 인격의 표시는 신체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있으며, 이해와 느낌과 의지를 가진 실재(實在)가 인격자이다.
①성령께는 지식이 있다(고전 2:11)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는 한 빛으로서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진리를 비추어 주고 더욱 힘있게 인식하게 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진리를 아시고 그 아시는 바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이다.
②성령은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쓰시는 신령한 인격자이시다(고전 12:11)
성령은 단지 우리가 붙잡아서 우리의 뜻대로 이용하는 신령한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으셔서 당신의 뜻대로 쓰시는 신령하신 인격자이시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성령이란 신령한 능력을 얻어서 그들의 뜻대로 이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무식한 우리는 필경 죄악을 짓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붙잡아서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스러우신 뜻대로 이용하실 수 있는 신령한 인격자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③성령의 생각(롬 8:27, 8:7)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마”는 지식, 감정, 의지의 세 가지 관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롬 8:7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또한 육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육신의 도덕적 및 지적(知的) 생활의 일부가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④성령의 사랑(롬 15:30)
성령은 단순한 맹목적인 감화력이나 능력이 아니고 친히 인자(仁慈)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령하신 인격자이다.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성령을 바라보며 “성령이여 저를 사랑하신 당신의 크신 사랑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여 본적이 있는가?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지만 성령의 사랑으로 인하여서도 받게 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를 찾아내시려고 날마다 나의 뒤를 따르며, 또 내가 그의 말씀을 듣지 아니 하였을 때와 그를 일부러 거역하며 그를 모욕하였을 때에도 나를 잊지 않고 따라다니신다. 또한 정녕코 괴로운 처지까지라도 따라오셔서 나의 미련함을 깨우치고 나의 비참한 상태를 알게 하셔서 바로 내가 구하던 구세주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또한 주님으로 모셔 들일 수 있게 하도록 성공할 때까지 도와주신다.
⑤성령의 지혜로움과 선하심(느 9:20)
지혜로움과 선함이 다 성령의 것이다. 이 구절처럼 인격자이신 성령의 교리를 구약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인격의 교리는 구약에도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교리 또한 구약에서도 수백 번이라도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거의 다 이 교리가 들어있는 것이다.
⑥성령도 근심하신다(엡 4:30)
성령은 죄를 극히 싫어하시는 거룩한 인격자이시다. 우리가 가장 적은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도 거부하시고 물러가시는 인격자이시다. 그러므로 한낱 떠도는 공상일지라도 성령께서 몰래 우리의 마음속에 잠깐 동안이나마 깃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언어와 생각에 조심하여 우리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을 즐거우시게 하려고 하는 능력 있는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원에서 오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우리의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될 어떤 생각이 나곤 한다. 이때에 생각을 마음속에 그대로 두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은 그 생각을 아시나니 그로 인하여 슬퍼하시리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는 먼저 가졌던 무익한 잡념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극장이나 댄스홀에 간다면 성령께서도 가실 것이다. 이런 장소가 성령께 알맞은 분위기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성령께서도 반드시 따라가신다. 식구끼리 화투놀이를 한다 할지라도 성령께 알맞은 분위기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안다면 단연 이런 노름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더라도 나만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진실로 모든 문제를 성령의 뜻대로 해결하기 원해야 한다.
2) 인격자만이 행할 수 있는 여러 행동을 성령께서 가지신다
①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통달하시는 분이시다(고전 2:10)
성령은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는 빛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통달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인격자이시다. 성령이 인격자가 아니시라면 도저히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②성령은 친히 기도하시는 인격자이시다(롬 8:26)
신자들은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신령하신 두 인격자를 모시고 있다. 한 분은 아버지 앞에서의 성자이시고, 또 한 분은 낮은 땅 위에서의 성령이시다.(요일 2:1, 히 7:25) 1901년 세계일주 여행 시 4만여 명이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아래서 설교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이며 또한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 신기하랴! 물론 지금도 그들이 나를 위하여 모두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남녀 4만명의 기도와 성자 그리스도와 나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해 주시는 보혜사 성령과의 두 신령하신 인격자를 모시는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두 신령하신 인격자를 모시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③성령은 가르치시는 분이시다(요 14:26, 16:12-13)
성령은 살아계신 인격자이신 교사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성서를 연구할 때마다 그 성서의 저자이신 성령을 모시고 우리에게 성서를 해석해 주시며 또 그 참뜻과 중심 사상을 가르쳐 주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가장 훌륭하다는 인간의 교사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으신 교사를 날마다 모실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인격자의 속성만 될 수 있는 속성이 성령의 속성이다(요 14:16-17)
성령은 우리 주 예수의 대신으로 오시는 다른 보혜사로서 표현되어 있다. 만일 주 예수를 대신하여 오시는 다른 분이 단순히 비인격적인 감화력이나 능력이었다면 주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리가 만무하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신령한 인격자이신 당신은 떠나가시되 대신 당신과 꼭 같이 신령한 인격자이신 다른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가장 귀한 약속 중의 하나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인격자로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며 온갖 위급한 경우에 있어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라는 말은 영어의 comforter 보다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가 보다 고상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람의 곁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위급한 일을 당할 때에 함께 서둘러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와준다는 뜻이다. 또한 요한1서 2:1의 대언자는 advocate로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부름받은”이라는 뜻인데 이 또한 그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떠나실 때까지는 친히 신자들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시어 언제나 도와주시려고 가까이 계신 친구였다. 이때에 제자들은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의례 주님께로 향하였던 것이다.(예 - 주기도문,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떠나가시게 되어 제자들이 낙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 대신 나와 꼭 같이 신령하시고 사랑이 많은 분이 오셔서 너희가 위급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능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일생 동안 아무런 공포의 순간도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시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떠한 위급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어찌 두려워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은 모든 두려움을 없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뉴욕주에 있는 어느 호수가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사경회가 끝난 후 약 4마일 떨어진 사촌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시간에는 폭풍이 불고 있었다. 사촌의 집으로 가는 호수 위의 비탈길은 어둠에 싸여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도랑이 여기저기 패여서 비탈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라 여관으로 되돌아 갈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너는 부흥사경회에서 성령은 인격자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신다고 설교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네 곁에는 지금 성령께서 동행하고 계시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 나는 어둠 속의 4마일을 즐거운 산보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걸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런던 로얄 알버트 교회의 젊은 부인은 어두운 방에 혼자 못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 후 그녀가 편지하기를 “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캄캄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캄캄한지요. 그러나 그 방은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빛나고 찬란했었습니다”
또 나는 불면증으로 2년 동안이나 암담하고 지긋지긋한 세월을 보낸 일이 있었다. 이때에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다가와 불면증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깊이 들게 되었다. 몇 해 동안은 이렇게 잘 지냈다. 그런데 시카고의 성경학교에서 불면증이 재발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전에는 바로 내가 아래층 강의실에서 성령의 인격에 관하여 말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위를 우러러 보며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영이시여, 당신은 지금 여기 계시나이다. 무엇이든지 나에게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성령께서는 입을 열어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묘하고도 귀중한 말씀을 들려주시어 나의 영혼을 안정과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 주셨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인격자이신 친구라는 사상은 또한 우리의 고적(孤寂)함을 소멸하여 주신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친구이시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면 일생 동안 아무런 외로운 순간도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한번은 바다에 떠있는 기선(汽船)의 갑판 위에서 밤에 거닐고 있었다. 갑판 위를 혼자 거닐고 있노라니 1만 7천마일 밖에 떨어져 있는 네 아이들의 생각이 나서 문득 마음이 쓸쓸해졌다. 이때에 나는 나의 곁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폭풍이 부는 이 밤에도 나와 함께 갑판 위를 거닐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고적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은 인격을 가진 친구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귀한 진리는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도 이를 없이하여 준다. 오늘날 세상에는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셔서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것만 알면 잠깐이나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인격자이시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가장 큰 능력과 도움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나타난 은사인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 유달리 부끄러움을 타는 성질이 있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면 머리털 끝까지 붉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교회의 기도회에서 말 한마디 못하였다. 나의 초기의 성직(聖職) 생활은 고통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즐거운 날이 돌아왔다. 내가 설교하려고 일어설 때, 나는 보지만 사람들은 볼 수 없다는 다른 한 분이 나의 곁에 계시다는 것과 또 설교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 분에게 있는 것이며, 나로서 해야 될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나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청중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 곁에 서 계신 분으로 하여금 설교하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옳은 것만 말씀하실 것이다. 성령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인격자이시다. 아마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다 성령이 인격자이심은 알고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성령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며 그를 인격자로 모시고 있는지가 문제이다.
성령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맡아 보시게 하려고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나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2. 죄인을 회개시키는 성령(요 16:7-11)
1)세상의 죄를 깨우치시는 성령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에 대한 심각한 의식을 일깨워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죄에 관련된 그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 중의 하나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과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부흥운동의 큰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거나 또는 나오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 자신이 하셔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에 대하여 눈이 어두우므로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세상의 죄를 깨닫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이론과 설복시킬 수 있는 힘이 강하고 또한 감상적인 이야기라든지 슬픈 노래를 듣고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만 가지고는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설교나 개인 전도에 있어서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잘못은 죄인을 회개시키려고 함에 있어서 우리가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려고 서두르는 것이다.
중앙철도국에서 근무하는 기사(技士)는 한 여전도사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으나 아무 감동도 받지 못했다. 여전도사의 부탁을 받은 나는 그와 이야기하면서 성령께서 친히 당신의 말씀으로 그를 감동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러자 십분도 채 못 되어 그 사람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였다. 이것은 신비로울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즉 그 여전도사는 그만 실수하였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실 일을 자기가 하여 자기의 힘으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죄를 깨닫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시카고시의 무디교회의 목사로 있을 때에, 우리는 교회 운영에 대하여 토의하지 말고 우리를 통회자복하게 하시는 성령을 보내달라고 부르짖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카고에 살며 노름을 하던, 생전에 처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고 하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더니 자기 죄를 모두 사함을 받았다는 기쁨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이와 같이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으려면 우리로서는 전혀 사람을 회개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실 줄 믿고, 그 일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께서 하여 주실 줄 바라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엇보다도 귀중한 일은 성령을 믿는 일이다. 죄를 일깨워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그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행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이다. 음주, 도둑질, 간음, 살인 그 밖의 어떤 부도덕한 짓을 행하는 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성령께서 일깨워주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신 그분을 믿지 않는 그 무서운 죄이다. 이 불신앙은 모든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하고 결정적인 죄이며 견디지 못할 저주받을 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2)성령은 세상으로 하여금 의(義)를 깨닫게 하신다
이 의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여 두신 의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와 그것을 어떻게 씻는 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신 의를 아는 것이다. 이것들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사람들이 죄를 뼈아프게 깨닫게 되면, 심각한 통회(痛悔)가 있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빛이 마음속에 비치어서 사죄하여 주심을 분명히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의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이다.
피츠버그의 집회에서 어떤 교인이 심령 부흥을 비방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밭고랑에 거꾸러져 죄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던, 그래서 밭고랑에서 일어나기 전에 구원을 받았던 일을 말했다. 이처럼 사람이 성령에 의하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죄를 통회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여주신다. 그러면 그는 곧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준비해 두신 그 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스코틀란드의 목사가 전국 여행 중에 여관에서 생긴 일이다. 여관 주인은 예배의 인도를 부탁했고, 목사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모일 것을 부탁했다. 한 하녀가 빠졌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목사는 그 불쌍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여종에게 큰 관심을 두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주여, 내 자신을 나에게 보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그 목사는 한 젊은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자는 “목사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과 또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나의 모든 죄 짐을 벗어버리고 저는 행복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렇다. 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해 두신 의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3)성령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깨우쳐 주신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은 심판이니 이는 곧 이 세상의 악마의 심판에 의하여 증명된 것이다.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심판에 대한 각성이 요청되는 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개가 장래에 있을 심판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다. 정통파다운 교역자들도 지옥을 잊어버리고 설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영원한 형벌의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교훈할 것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이 듣기 좋아하는 것만을 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왜 우리 목사들이 지옥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을까? 확실히 이에 대하여 설교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설교에 복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에 심판을 믿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구주(救主)를 배척하는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계시로 깨달았다. 그 날부터 나는 조금도 성서에서 가르친 장래의 형벌에 대하여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4)성령은 신자들을 통해서만 세상을 깨우치신다(요 16:7-8)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그는 당신의 역사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행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은 신자에게 오셔서 그가 임하시는 신자를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회개의 사실은 모두 사람의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라도 사람의 회개를 통하지 않고 된 것이 없다.(고넬료의 회개, 사울의 회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은 다 그 입술을 성령께 바쳐서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누구에게나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달아 알게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여러분의 생활에서 철저히 몰아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기에 조금도 막힘이 없는 통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지시를 받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되 날카롭게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 브라이톤에서 우리 동역자 한 사람이 음식점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다가 식사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전도하려고 기다리다가 주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은 그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시중들고 나서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자살했습니다”
우리는 엄숙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하여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 계시면 곧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만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3.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1)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명하시는 성령(요 15:26-27)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또한 성령은 모든 일을 듣고 우리에게 선포하여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개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직접적인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만 우리는 진실하시고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고전 12:3)
성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주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다.(행 5:32, 요 7:7) 이 말씀은 비록 복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요한복음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읽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뜻을 순복시키고 또 복음을 읽을 때까지 자기가 읽는 바를 그의 심령에 해석하여 주실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복음을 한 번이라도 통독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교역자들에게는 흔히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기 위하여 물어보러 오는 사람이 있게 된다. 이때 너무나 상대자가 깨닫지 못할 때는 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둔할까 하고 생각하게 될 때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이다. 그 사람도 다른 일에 대해서는 여간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번이고 싫다 말고 되풀이하여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그 질문하러 온 사람의 심령에 당신의 증거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밝히 나타내려면 우리 자신의 말재간이나 권면의 힘이라든지 또는 자기의 성서 지식이나 그 지식을 이용하는 방법에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혀 무능한 것임을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어 성령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게 하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실 수 있을만한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게 하도록 힘쓸 것이다.
2)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요 3:3-5)
중생의 정의 1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는 것이다.(엡 2:1)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데 성서를 도구로 쓰심은 물론이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성서에 기록된 말씀은 성령께서 사람을 중생하게 하시는 데 이용하시는 도구이며, 중생이 일어나게 하는 데 말씀을 이용하시는 분은 성령뿐이시다.(벧전 1:23, 약 1:18)
그러므로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는 뜻은 책에 기록된 말씀, 곧 단순한 의문은 죽이는 것으로서 사람을 정죄하고 죽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심령, 심비에 하나님의 영이 기록하신 말씀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곧 살아 계신 성령이 오늘날 개인의 심령을 차지하고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에 기록하여 주셔야만 사람이 살아있고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이다.
설교나 개인전도나 또는 가르침으로써 아무리 기록된 말씀이나 성서를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나 개인전도나 가르침으로써 사람을 거듭나게 하기 원한다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그에게 개인전도나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성령께서 우리의 상대자의 심령에 가져가게 하시고 또한 우리 자신은 성령께서 당신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의 정의 2
중생은 새로운 성품 곧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이다.(벧후 1:3-4) 왜냐하면 가문이 훌륭하고 부모가 경건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진리에 어두운 마음과(고전 1:14)부패한 애정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땅히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될 것을 미워한다. 또한 우리는 모두 옳지 못한 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롬 8:7)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든 비열한 것이든 간에 이것들은 죄의 본질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기초를 둔 의지는 어떤 것이거나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는 의지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의지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이지적으로, 감성적으로 또는 의지적으로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새로운 성품을 가지게 된다. 먼저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새로운 성품을 받는다. 어느 날 집회에 들어왔던 불신자인 그는 고급 관리였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 사람은 즉석에서 거듭났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그에게 미련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낮과 같이 밝아져서, 일주일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이 진리를 깨우쳐 주려고 힘쓰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를 빛으로 인도하였으며, 그 후 일년이 못되어 복음을 전도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정적(靜的) 성품도 받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좋아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좋아하게 된다. 성서를 날마다 읽기는 하였지만 나는 성서를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거듭난 후부터는 내 마음은 성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무도회, 노름장, 경마장 같은 데 가는 것은 싫어졌고,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와 주일에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고후 5:17)
그리고 새로운 뜻도 받게 된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의 의지는 이미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자신의 욕망은 무가치한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이 중요한 일이 된다. 이 성품을 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새로운 성품을 새로 난 사람에게 주시는 데 이용하시는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려고 하면 성서만 읽는 것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서를 읽는 동시에 우리의 모든 뜻을 성령께 바치겠다는 태도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한 단지 기록된 그대로의 복음만은 저주와 죽음을 알려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말씀만 고집하는 이른바 전통적인 교역자나 교사의 전도는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지혜의 권하는 대로 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2:4)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데 필요한 조건이 우리에게 구비(具備)만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역사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심령은 밭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종자이며, 교역자와 교사와 개인 전도자들은 씨 뿌리는 사람이다. 일을 행하시도록 그에게 맡긴다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뿌린 씨에 생명을 주실 것이며, 그들의 심령은 신앙으로 덮이어 결국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게 된다. 나는 사람이 갑자기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중생도 믿는 바이다. 회개란 외형적인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생은 사람의 심령과 정신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속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로서 생명을 받고 새로운 성품을 받는 것이 중생이다.
나는 사람의 돌연한 중생, 곧 속사람이 갑자기 온전히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 성서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나는 수없이 이러한 사실들을 목격하였다. 나와 함께 몇 해 동안 동역했던 무디 교회의 부목사인 윌리엄 에스 제이콥은 42세가 되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평판이 있는 심한 죄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어느 날 밤, 복음 전도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회개하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일찍이 가져 본 일이 없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될 만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우리가 어찌 돌연적인 중생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기록된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성령께서 중생의 역사를 하시는 권능을 믿으며 또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 속에 뿌려진 말씀에 생명을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셨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발로 서서 설교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한, 지구 위에 사는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단념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성령의 권능 안에서 설교하며 가르치려고 결심하고 있는 바이다.
이 신생(新生)의 교리는 영광스러운 교리이다. 이것은 거짓된 소망을 쓸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네가 아무리 철저하게 생활을 혁신하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한 “온후한 인격과 친절한 마음과 관대한 동정심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리는 종교의 외형적인 것으로 자신을 가지는 사람에게도 “그대는 모든 외형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거듭나야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거듭났는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거듭날 수 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준비만 하고 있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으며, 남은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자리의 준비뿐이다.
4. 완전하고 영원한 만족
1)완전한 만족(요 4:14)
우리는 주님께서 어떠한 경우에 이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제6시”라는 말을 대낮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연구의 결과 요한이 복음을 기록하던 에베소에서는 지금의 오후 여섯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주님은 온종일 한 도보의 여행길에 너무도 피곤하셔서 샘물가에 앉으셨다. 그런데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을 보시고는 주님께서는 영혼을 구하기 원하시는 갈증을 느끼셨다.
여기서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또 다시 목마르리라”고 하셨다. 진실로 옳은 말씀이다. 모든 세속적인 만족과 기쁨의 샘은 그것을 아무리 깊이 들여 마셨다 하더라도 다시 목마르게 되는 것이다. 명예, 권세, 향락, 과학, 예술 등의 샘물을 아무리 마신다 해도 다시 목마르게 된다. 즉 하나도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계속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물은 성령이며 주님을 믿는 자와 선물을 간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을 자기의 심령 속에 계실 분으로 진정 모셔 들이는 사람은 완전하며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된다.
기쁨의 근원을 우리의 자신 속에 둔다는 것, 곧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지체나 또는 우리의 소유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 기쁨의 원천을 가진다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는 환경이나 사정이나 또는 재물이 있고 없는 데는 전혀 관계없이 언제나 기쁠 것이다. 자기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이 들릴 때에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 하더라도 꼭 같이 기뻐할 것이다.
수년 전에 내 아내와 내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당했던 일이 지금도 역력히 생각난다. 우리 내외에게는 아홉 살 난 아주 애교 있고 귀염성 있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편도선염에서 디프테리아로 이어지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지만, 딸의 상태는 곧 회복되는 것 같아서 우리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자벳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떠나가고 말았다. 보건소 직원들이 들어와서 어린 아이의 시체를 곧 묻으라고 명령했다. 물론 장례하는 곳에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어린 것의 오빠와 동생들까지도 함께 가지 못하고 길 건너편에서 저들의 누이의 시체가 누워 있는 곳을 건너다 볼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성서학원으로 가는 길모퉁이에서 나는 “오, 엘리자벳”하고 목을 놓아 울었다. 바로 이때이다. 내 마음속에 깃들여 있던 그 샘물이 내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하던 큰 세력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이때에 나의 일생에 처음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을 느끼었다. 아, 성령의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의 외부적 조건으로는 전혀 얻을 수 없고 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고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기쁨의 샘이 있을 때만 이 샘이 솟고 또 솟아 일년 365일을 두고 어떠한 경우에 처해 있든지 끊임없이 영생토록 솟아나는 기쁨을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2)영원한 만족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샘을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여러해 전 뉴햄프셔 주에서 구입한 토지에서, 집터를 닦기 전에 발견한 우물은 맑기가 수정 같았다. 몹시 날이 가물 때에도 우물에는 물이 풍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마셨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결점은 내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될 때, 그 우물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서전쟁(美西戰爭)을 하는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아무데도 마실만한 샘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보기에도 좋았고 물맛도 좋았다. 그러나 그 우물은 마시기만 하면 배탈이 났다. 우리 집 우물이 그리웠지만 수백리 밖에 떨어져 있는 그 우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우물에 비할 데 없는 한 샘이 있었으니, 내 육신은 비록 목말랐으나 나의 영혼은 이 샘으로 인하여 만족하였었다. 이는 곧 나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샘이 계속 솟아나서 영생과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의 심령에 만족과 기쁨의 샘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는 세상의 기쁨의 근원에는 전혀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생각하기를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춤을 추지 말라, 노름을 하지 말라, 극장에 가지 말라, 그 밖의 이러저러한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본다. 훨씬 좋은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고 또한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충만히 계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정같이 말고 깨끗한 샘물이 어디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흙탕물을 마시려고 찾아갈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어째서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세속적인 향락을 취하러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껏 그들은 성령을 그들에게 내재시키는 생명과 희락과 만족의 샘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샘이 막혀버린 탓일 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이 성령의 샘을 못 가졌거나 막혀 있을 리가 만무하다. 성령의 샘이 왜 막힐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출생한 곳에서 약 20마일 떨어진 뉴욕주 제네바로 갔었다. 우리는 주택을 샀는데, 그 집의 원주인은 건축비를 많이 들여서 여러 날 공사를 했는데,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음료수였다. 좋은 샘물이 있기는 하였지만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물이 많이 나오는지 집터가 온통 침수가 되리라고 생각될 만큼 물이 많이 솟았다. 그래서 물이 솟는 큰 구멍을 찾아내어 양탄자 조각으로 막고 돌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물이 도무지 나오지 않으므로 우물은 완전히 헛것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원주인은 우물에 들인 노력을 생각하여 다시 우물의 구멍을 막아 놓은 양탄자를 빼버렸는데, 이때는 물이 과하게 나오지 않는 훌륭한 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만일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기쁨의 원천인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샘물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샘물의 구멍이 죄의 헌 누더기, 즉 세속적인 취미의 헌 누더기로 막혀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헌 누더기를 빼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호주 멜버른의 집회 때에, 영국교회의 한 목사는 기쁨의 샘구멍이 꼭 막혀 버렸었다. 그는 나의 설교를 듣고 그의 심령 속에서는 큰 불안이 생기고 옛날에 맛보던 그 기쁨이 몹시 그리워졌다. 그는 켄트목사의 도움을 받아 낡은 양탄자 헝겊을 빼내고 전에 느꼈던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 내려오다가 그것을 잃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못나오게 막고 있는 것을 찾아내서 다시 나오도록 하자.
영국 브리스톨의 집회에서는 이 기쁨의 샘구멍을 담배가 막고 있었던 사람이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각기 자기의 심령에 있는 샘물을 막고 있는 마개를 찾아내자. 아마도 샘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쁨의 샘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고, 또한 그 마개를 가르쳐 주시면 그것을 빼어버리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는 성령의 기쁨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또한 요한복음 4장 10절을 통하여 주 예수께 구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말로만이 아닌 진정으로 구해야 한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령의 샘을 갖겠다는 갈망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 순복시켜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까닭이다.(행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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