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룡편저, [신학적성령론]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1989)
요 약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성령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접근한 신학적 성령론을,
둘째 부분은 현대신학자들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살펴 본 것으로 20세기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던 칼 바르트(K. Barth), 폴 틸리히(P. Tillich), 몰트만(J. Moltmann)의 견해를 살펴보았고,
셋째 부분은 성령의 은사운동에 대한 신학적 규명과 함께 미국장로교회가 성령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성경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고백한 내용을 고찰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편 신학적 성령론
기독교신학에서 성령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절대적이다. 첫째,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성령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죽음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리하여 그것은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과거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대한 현재적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초월하여 온 세대와 인류에 대한 보편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넷째, 신앙과 관계된 모든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능력을 통하여 이룬 자기 업적과 자기 의로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기체적인 몸이 아니라 내적 일치성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것이며,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활동에 불과할 것이다. 설교와 성례도 그들의 본래적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여섯째, 역사의 종말은 우리의 현재와 관계없는 신화적인 미래로 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언제나 다시금 옴으로써 역사의 현재를 개방시키고, 인간과 그의 세계를 역사화 시키는 그의 창조적이며 변증법적인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이리하여 기독교의 유토피아적인 힘이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내용들을 고려할 때 성령론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구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참으로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임도 알 수 있다. 만일 성령의 존재가 누락될 경우,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없으며 기독교 자체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이 되거나 다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학적 토의에 있어서, 특히 종말론적 사고에 있어서 성령론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성령의 실존을 구체화시켜 신학적으로 검토하면 다음과 같이 고찰 할 수 있다. 첫째,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을 가진 비피조자로서의 성령. 둘째, 다른 모든 영이 추종할 수 없는 거룩한 영으로서 어떤 생물이나 물체의 모양으로 표현해서는 안되고 순수한 영으로서의 성령. 셋째, 시간을 초월한 비시간적, 초시간적 존재로서의 성령. 넷째,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편재한 초공간적 존재로서의 성령. 다섯째, 스스로 자족한 상태에 계신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체험적 대상으로서의 성령. 여섯째,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적 존재로서 자연, 역사, 인간 속에서 변화를 가져다주시는 역동적 존재이시다.
제2편 현대 신학자의 성령론
- 바르트의 성령론 : 바르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 또는 삼위일체적, 기독론 중심적이라고 한다. 본 책에서는, 그렇다면 그의 신학체계 속에서 성령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의 신학체계 속에 나타난 성령론을 고찰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계시와 성령, 교회와 성령, 인간과 성령, 바르트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에 나타난 성경해석등의 순서로 살펴보고 있다. 결론으로 바르트는 성령을 삼위일체론의 구조 안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특별히 그리스도와 관련시켜서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의 성령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고전적 전통을 지키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성령이해에 곤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경과 교회전통에 충실한 성령이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공헌은 매우 크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세계의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야 하겠으며, 역사현실 속에서 활동하시는 생을 창조하는 영이 되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점에서 미흡한 것이 아쉽다. 더 나아가 성령의 종말론적인 차원도 더 확대되었더라면 하는 바램도 갖게 된다.
- 탈리히의 성령론 : 틸리히는 대답하는 신학으로 항상 모든 시대와 문화의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것을 주장하여 상관관계의 방법을 통해서 기독교가 지닌 종교적 상징들을 현대인에게 문화양식의 빛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 학자이다.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타당성은 인간생명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계를 사용하지 않고 차원을 사용한 점과 인간 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것은 타당하며, 성령의 현존은 매체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현시되고, 성령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인간의 모든 삶의 차원에 나타나며, 인간의 영에서만 파악되고 성령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그리스도인 예수 안에서만 왜곡됨 없이 나타난다는 점등은 매우 긍정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성령은 누구인가에서 비롯된다. 틸리히는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왜곡없이 나타났지만 예수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성령을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 몰트만의 성령론 : 몰트만은 구체적으로 성령론에 관한 책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령론에 관한 그의 사상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보면, 그의 사상의 핵인 종말론에서부터 삼위일체론과 교회론, 그리고 성령론이 시작되고 근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역사는 종말론으로 바뀌어지고 종말론은 역사로 바뀌어지면서 이 변화를 가져온 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은 이 역사의 의미가 선취되는 것에 대한 성령론적 해석으로 대치하고 있다. 즉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성령은 이해되고 있으며 성령론적 관점에서 종말론은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성령의 구체적 언급들이 부족한 점을 들 수 있다.
제3편 성령의 은사에 관한 신학적 고찰
성령과 교회의 관계와 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고찰한 것은 성령에 대한 이해의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며, 성령을 통한 바른 교회관을 정립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주관하지 아니한 교회는 하나의 제도와 조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목적은 성취된다. 또한 자유하신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역사 하심으로써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제도적인 측면과 공동체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세우시고 하나님의 현존을 가져오신 성령은 개인적인 회개, 신앙, 성화를 통하여 개인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치유하는 능력임과 동시에 사회, 정치,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 해방시키고 변화시키는 치유의 능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사, 세계사의 차원에서 이루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이기도 하다. 이는 종말에 성취될 약속의 성령으로서 창조의 능력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힘이다.
비 평
현대신학의 조류가 신론 중심적 신학에서 그리스도론 중심 신학에로 발전되어 왔으나, 앞으로의 신학은 성령론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리라고 보고 현대의 중요한 신학적 방향은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라고 보는 필자의 견해는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저 단순히 과거의 전통적인 성령론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는 삶의 자라에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성령론의 의미를 찾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론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한 필자의 노력은 너무나도 당연한 작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통하여 신앙의 형태, 내용 등을 새롭게 정립하므로 하나님의 현존인 성령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영역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성령은 개인적인 회개, 신앙, 칭의, 성화를 통하여 개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변화시키는 치유의 능력임과 동시에 인류사적, 세계사적 차원에서 이루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 즉 '성령은 종말에 성취될 약속의 성령으로써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는 힘이다'라고 주장하는 바에 공감이 된다. 신학이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그 신학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며, 또 시대를 선도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론을 너무 개인적 차원으로만 제한해 왔다. 이제 우리는 교회, 이웃, 사회, 역사와 세계와의 관계에서 현존하시므로 이 모든 것 속에서 변화시키고 치유하시는 성령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학적 성령론]은 어느 정도 대안들을 보여 주고 있다. 특이나 pp. 268-291에 요약되어 있는 성령에 관한 성경적, 개혁주의적 견해는 위에 언급한 여러 가지의 실례들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틀란타노회 내의 몇몇 교회에서 성령운동에 몰두하게 된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생기게 되자, 이런 문제에 당면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제기된 신학적, 실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보고서는 성령에 관한 체험과 가르침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을 신학적이면서도 실천적으로 지침을 마련해 주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부각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운동이 개혁주의 신학과 어떻게 일치되는가와 일치되지 않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큰 수확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께 다가설 수 있고, 삶속에서 힘을 얻기 위해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존해야 하는 것, 언행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은 일치되며, 교회의 고백과 신조의 지도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것, 하나님께서 삶 전체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 개인적이거나 배타적인 기독교 편을 드는 것, 각기 다른 기독교인들 속에서 성령이 임하고 역사 하신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와 성찬을 무시하는 것, 성경 전체를 통해 기독교의 신앙과 삶이 수정될 수 없다는 점등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런 여러 점에서 볼 때 [신학적 성령론]이 성령론에서 필독서가 되지 않는 것은 아쉽다. 특이나 필자 자신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15년이나 긴 투병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험을 토대로 더불어 사는 인생, 감사하는 마음을 설파하는 중에 나온 [신학적 성령론]은 날마다 부딪히는 삶의 현장 속에서 무척 도움을 주는 책이며, 훌륭한 성령론의 교과서가 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성령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접근한 신학적 성령론을,
둘째 부분은 현대신학자들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살펴 본 것으로 20세기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던 칼 바르트(K. Barth), 폴 틸리히(P. Tillich), 몰트만(J. Moltmann)의 견해를 살펴보았고,
셋째 부분은 성령의 은사운동에 대한 신학적 규명과 함께 미국장로교회가 성령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성경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고백한 내용을 고찰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편 신학적 성령론
기독교신학에서 성령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절대적이다. 첫째,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성령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죽음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리하여 그것은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과거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대한 현재적 사건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초월하여 온 세대와 인류에 대한 보편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넷째, 신앙과 관계된 모든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능력을 통하여 이룬 자기 업적과 자기 의로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기체적인 몸이 아니라 내적 일치성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것이며,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활동에 불과할 것이다. 설교와 성례도 그들의 본래적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여섯째, 역사의 종말은 우리의 현재와 관계없는 신화적인 미래로 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언제나 다시금 옴으로써 역사의 현재를 개방시키고, 인간과 그의 세계를 역사화 시키는 그의 창조적이며 변증법적인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이리하여 기독교의 유토피아적인 힘이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내용들을 고려할 때 성령론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구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참으로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임도 알 수 있다. 만일 성령의 존재가 누락될 경우,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없으며 기독교 자체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이 되거나 다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학적 토의에 있어서, 특히 종말론적 사고에 있어서 성령론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성령의 실존을 구체화시켜 신학적으로 검토하면 다음과 같이 고찰 할 수 있다. 첫째,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을 가진 비피조자로서의 성령. 둘째, 다른 모든 영이 추종할 수 없는 거룩한 영으로서 어떤 생물이나 물체의 모양으로 표현해서는 안되고 순수한 영으로서의 성령. 셋째, 시간을 초월한 비시간적, 초시간적 존재로서의 성령. 넷째,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편재한 초공간적 존재로서의 성령. 다섯째, 스스로 자족한 상태에 계신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체험적 대상으로서의 성령. 여섯째,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적 존재로서 자연, 역사, 인간 속에서 변화를 가져다주시는 역동적 존재이시다.
제2편 현대 신학자의 성령론
- 바르트의 성령론 : 바르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 또는 삼위일체적, 기독론 중심적이라고 한다. 본 책에서는, 그렇다면 그의 신학체계 속에서 성령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의 신학체계 속에 나타난 성령론을 고찰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계시와 성령, 교회와 성령, 인간과 성령, 바르트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에 나타난 성경해석등의 순서로 살펴보고 있다. 결론으로 바르트는 성령을 삼위일체론의 구조 안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특별히 그리스도와 관련시켜서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의 성령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고전적 전통을 지키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성령이해에 곤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경과 교회전통에 충실한 성령이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공헌은 매우 크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세계의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야 하겠으며, 역사현실 속에서 활동하시는 생을 창조하는 영이 되어야 할 터인데 이런 점에서 미흡한 것이 아쉽다. 더 나아가 성령의 종말론적인 차원도 더 확대되었더라면 하는 바램도 갖게 된다.
- 탈리히의 성령론 : 틸리히는 대답하는 신학으로 항상 모든 시대와 문화의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것을 주장하여 상관관계의 방법을 통해서 기독교가 지닌 종교적 상징들을 현대인에게 문화양식의 빛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 학자이다.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타당성은 인간생명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계를 사용하지 않고 차원을 사용한 점과 인간 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 것은 타당하며, 성령의 현존은 매체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현시되고, 성령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인간의 모든 삶의 차원에 나타나며, 인간의 영에서만 파악되고 성령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그리스도인 예수 안에서만 왜곡됨 없이 나타난다는 점등은 매우 긍정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성령은 누구인가에서 비롯된다. 틸리히는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왜곡없이 나타났지만 예수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성령을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 몰트만의 성령론 : 몰트만은 구체적으로 성령론에 관한 책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령론에 관한 그의 사상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보면, 그의 사상의 핵인 종말론에서부터 삼위일체론과 교회론, 그리고 성령론이 시작되고 근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역사는 종말론으로 바뀌어지고 종말론은 역사로 바뀌어지면서 이 변화를 가져온 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은 이 역사의 의미가 선취되는 것에 대한 성령론적 해석으로 대치하고 있다. 즉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성령은 이해되고 있으며 성령론적 관점에서 종말론은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성령의 구체적 언급들이 부족한 점을 들 수 있다.
제3편 성령의 은사에 관한 신학적 고찰
성령과 교회의 관계와 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고찰한 것은 성령에 대한 이해의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며, 성령을 통한 바른 교회관을 정립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주관하지 아니한 교회는 하나의 제도와 조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목적은 성취된다. 또한 자유하신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역사 하심으로써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제도적인 측면과 공동체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세우시고 하나님의 현존을 가져오신 성령은 개인적인 회개, 신앙, 성화를 통하여 개인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치유하는 능력임과 동시에 사회, 정치,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 해방시키고 변화시키는 치유의 능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사, 세계사의 차원에서 이루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이기도 하다. 이는 종말에 성취될 약속의 성령으로서 창조의 능력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힘이다.
비 평
현대신학의 조류가 신론 중심적 신학에서 그리스도론 중심 신학에로 발전되어 왔으나, 앞으로의 신학은 성령론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리라고 보고 현대의 중요한 신학적 방향은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라고 보는 필자의 견해는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저 단순히 과거의 전통적인 성령론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는 삶의 자라에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성령론의 의미를 찾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론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한 필자의 노력은 너무나도 당연한 작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통하여 신앙의 형태, 내용 등을 새롭게 정립하므로 하나님의 현존인 성령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영역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성령은 개인적인 회개, 신앙, 칭의, 성화를 통하여 개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변화시키는 치유의 능력임과 동시에 인류사적, 세계사적 차원에서 이루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힘, 즉 '성령은 종말에 성취될 약속의 성령으로써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는 힘이다'라고 주장하는 바에 공감이 된다. 신학이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그 신학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며, 또 시대를 선도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론을 너무 개인적 차원으로만 제한해 왔다. 이제 우리는 교회, 이웃, 사회, 역사와 세계와의 관계에서 현존하시므로 이 모든 것 속에서 변화시키고 치유하시는 성령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학적 성령론]은 어느 정도 대안들을 보여 주고 있다. 특이나 pp. 268-291에 요약되어 있는 성령에 관한 성경적, 개혁주의적 견해는 위에 언급한 여러 가지의 실례들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틀란타노회 내의 몇몇 교회에서 성령운동에 몰두하게 된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생기게 되자, 이런 문제에 당면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제기된 신학적, 실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보고서는 성령에 관한 체험과 가르침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을 신학적이면서도 실천적으로 지침을 마련해 주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부각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운동이 개혁주의 신학과 어떻게 일치되는가와 일치되지 않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큰 수확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께 다가설 수 있고, 삶속에서 힘을 얻기 위해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존해야 하는 것, 언행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은 일치되며, 교회의 고백과 신조의 지도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것, 하나님께서 삶 전체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 개인적이거나 배타적인 기독교 편을 드는 것, 각기 다른 기독교인들 속에서 성령이 임하고 역사 하신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와 성찬을 무시하는 것, 성경 전체를 통해 기독교의 신앙과 삶이 수정될 수 없다는 점등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런 여러 점에서 볼 때 [신학적 성령론]이 성령론에서 필독서가 되지 않는 것은 아쉽다. 특이나 필자 자신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15년이나 긴 투병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병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험을 토대로 더불어 사는 인생, 감사하는 마음을 설파하는 중에 나온 [신학적 성령론]은 날마다 부딪히는 삶의 현장 속에서 무척 도움을 주는 책이며, 훌륭한 성령론의 교과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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